사순절, 기억의 시간
주현절기가 지나고 돌아오는 성회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이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분주한 현실과 미래의 들뜬 기대를 잠시 내려놓고 오래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 속으로 침잠하는 ‘기억의 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나를 기억하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다. 나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과 피를 나눠 준다는 것은 지극히 사랑한다는 뜻을 넘어서 ‘너는 나다, 너는 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우리는 결코 주님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이 사실을 부디 잊지 말고 기억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언어학적으로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지만, ‘기억하다’는 영어로 ‘Re-member’ ‘다시 멤버(하나)가 되다’라는 뜻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과 하나 되었던 존재라는 기억,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사랑받는 존재라는 기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성찬을 베풀어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Jesus remember me’라는 떼제의 노래 속에 담긴 누가복음의 십자가 우편 강도의 고백처럼 정작 우리가 먼저 주님께 기억해 달라 애원해야 하건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기억해달라 부탁하십니다.
사진이나 기념품 등 우리 삶의 자리 곳곳에는 우리를 기억으로 이끌고 기억 속에 잠기게 하는 기억의 파편과도 같은 물건들이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사순절을 살아낼 때에도 우리를 십자가 사랑의 기억 속으로 이끄는 것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아들로부터 뜻깊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최근 마태수난곡에 관한 글을 쓰며 마음을 빼앗겼던 그림 한 점이 있었는데 때마침 생일이라 아들로부터 선물로 받으면 더욱 의미 있을 것 같아 제가 먼저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잘 알려진 그림이 아님에도, 동일한 화가의 비슷한 그림이 여러 점 남아있음에도 딱 제가 원하는 그림이 캔버스에 프린트 되어 국내 한 업체에서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의 ‘십자가의 그리스도(The Crucifixion)’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1675년경 작품입니다.

무리요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다른 작품을 바라보면 일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따스하고 깊으며 이상을 바라보는 눈은 참으로 진실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어떤 화가 보다 사실적이면서도 영적인, 마음에 푸근하게 와 닿는 성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생일날 저녁에 받은 그 그림을 저는 교회사무실 제 책상 뒤에 있는 옷장 문에 걸어두었습니다. 오늘도 여러 번, 한참동안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모조품이긴 하지만 이번 사순절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저의 신앙 여정과 함께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십자가 그림은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묵상에 방해가 되곤 하는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사실주의 화풍을 보이는 그의 이 그림은 그런 면에 매우 균형 잡혀 있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녹음으로 치면 레온하르트 지휘의 1989년 음반처럼 말입니다.
성회수요일의 재를 연상케 하는 짙은 배경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눈길인 듯 십자가의 주님의 몸을 감싼 따스한 빛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예루살렘의 실루엣을 넘어 저 멀리 부활 아침을 상징하는 먼동의 빛으로 연결됩니다. 거친 붓 터치로 흘려 그렸지만 그 선하신 얼굴에 어린 고통과 외로움은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어둡고 잔혹해 보일 수 있겠지만 제게는 이 그림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상징들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보다 더 깊은 신앙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곧 사순절이 시작합니다. 십자가와 관련된 말씀 한 구절이어도 좋고 음악이나 그림, 작은 십자가도 좋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으로 이끄는 여러분만의 기억의 도구와 함께 사순절, 기억의 시간에 깊이 침잠해 보시면 어떨까요?
https://youtu.be/5g6Q-uSV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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