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유망(傳道有望)
얼마 전 감리회의 감독들이 광화문과 서울역에서 전도물품도 나눠주고, 팻말도 들고 서있고, 노숙인들에게 안수하며 기도도 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는데, 매일 전도를 하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감염병 시국에서 조금 벗어나 눈에 띄게 줄어든 예배 출석 인원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비단 감리회만의 움직임만은 아닙니다.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어른들이 전도의 구호를 외치며 나서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지만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전도에 대한 회복이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도유망(前途有望)은 원래 ‘앞길에 희망이 있음. 장래가 유망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서 ‘전도유망한 젊은이’, ‘그 사업은 전도유망하다.’와 같이 사용합니다. 여기서 저는 조금 다른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소망이 있다(傳道有望)”는 뜻으로 쓰고 싶습니다.
저는 코로나 19 이전에는 매일, 2020년 3월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비정기적으로 거리와 버스정류장, 지하철역에서 계속 전도를 하면서 10년 넘게 지역 목회를 해 왔습니다. 감리회의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행2:36)’을 전하는 전도의 본래 목적과 함께 직접 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이 목회자에게 큰 유익을 주기에 ‘목회자의 자기 훈련’으로서 같이하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1. 소망이 없던 목사에게 전도는 사명을 다시 불어넣어줍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이시다 라는 명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저 유명한 바흐의 곡을 들어보십시오. "인류의 소망과 기쁨 되시는 예수(J. S. Bach - Cantata BWV147, Jesus Joy of Man's Desiring)"
참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고 들은 바를 전할 이유가 되며 그것을 전할 때, 우리에게 다시 소망이 된다. 유명한 전도자 말처럼 세상을 바라보면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재물을 바라면 있음으로 자만 또는 공허하게 되거나 부족할 때 초라해질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한때 사랑하나, 이내 곧 실망하거나 미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란다면 오직 그에게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목사 자신의 믿음을 다시 확증하게 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전 13:5)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후 9:27)
목사는 믿음이 있어야한다지만 목사가 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신앙인, 신앙인 이전에 하나님 지으신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목회 사역을 감당하다보면 자신이 제 한 몸 겨우 건사할 믿음조차 없어 허덕이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존 웨슬리에게 확신이 들 때까지 설교하라고 했다던 스팡겐버그의 조언은 설교할 수 있는 강단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모인 회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뜻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강단이든, 거리에서든, 누구를 만나든지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너의 구주되심을 증거하고 전할 때, 그 안에 확신과 믿음의 증거를 얻을 수 있다는 자연스러운 농사원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씨를 뿌리면 난다는 것을 믿기에 ‘씨를 뿌릴 때 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말고 뿌리라’는 것을 우리는 찬송 가사를 통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3. 목사 주변에 믿음을 가지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저는 전도가 교회의 양적 성장의 도구(교인 숫자 불리기)로 전락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것은 2000년도 넘는 교회 선교역사의 핵심이자 원천인 전도와 선포를 비참한 영업 전략쯤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우리가 길에서 전도 행위에 동참하는 것 그 자체에는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는 마음, 그 안에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불붙는 마음이 있을 때, 전도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능력만이 전도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인도하기 위한 홍보 전략이나 미끼로써 전도를 도구화 한다면 우리의 전도는 필시 인기 없는 캠페인 정도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은 마음의 감화로 인해 기꺼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선다면 상황과 여건을 넘어 그는 담대한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전도를 지속하다보니 주변에 전도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어느새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전도이든,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전도든, ‘전해지는 것은 그리스도(빌1:14-18)’ 임을 깨달았습니다.
‘삶으로 전도’하라는 말 앞에서
신학교 시절부터 오랫동안 큰 바위 얼굴처럼 실물교사가 되어주시는 한 목사님의 설교 중 이 시대에 ‘예수 구원과 천국을 외치며 믿음으로 초청하는 전도의 공허함’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목사님은 글을 쓰시거나 설교와 강의를 하시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감동하여 믿음의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되묻는 그런 훌륭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동네사람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젊은 목사가 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다면서 거리에 나와서 전도하기 시작하면 ‘힘든데 애쓴다’는 식의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였습니다. 부르짖어 외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저절로 들었습니다. 비루한 제 이름 석자보다 예수님이 비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제발 이런 옛날식 전도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관계를 통해 삶으로 전도하라’고 진지하게 권해주는 평신도들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면부지 관계도 없는 곳에서 그런 권면은 전도의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기는커녕 아주 전도를 포기하게 만들 뻔 했습니다. 삶으로 전도하겠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입도 뻥긋 못하고 전도 한 번 못하다가 끝날 것 같아 전도지를 만들어 들고 거리로 나가서 한 사람, 또 한 사람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제가 믿고 보니 예수님 같은 분이 또 없고, 믿음은 참 좋은 길입니다.“
“막막할 때 예수님이 살 길이십니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께 나오셔야합니다. 그분이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당신과 당신의 가정이 구원을 얻습니다.”
전도의 초심자임을 인정하고 노방 전도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전도하며 사람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전도 하는 사람답게’ 살아갈 기회도 가끔 생깁니다. 굳이 전도지를 들고 나가지 않았지만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다보니 꽤 친한 사람도 생깁니다. 동네 이웃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을 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나누기도 하고, 그 사람의 고민을 듣기도 했으니 저도 언젠가 '삶으로 전도하는 그 수준'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무명의 동네 목사도 전도하니 좋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신현희 목사/안산나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