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방언은 '은사'가 아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방언을 할 수 있는 신자라야 비로서 성령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면서 1차 세례는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2차 세례, 즉 성령 세례를 받아야 능력의 영이 임해서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차고 넘치는 충만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을 확신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를 받습니다”
흔히 듣는 말이다. 결국, 방언하는 자만이 은혜받은 신자로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말인데... 과연 방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며,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반드시 방언을 하는가?
한 마디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남자라면 누구든지 태어나서 8일째 할례를 받았던 것처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때가 되면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받는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을 때 예수는 요한처럼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자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특별히 잘난 유대인들만 따로 선택해서 할례를 받지 않는 것처럼,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주께서 베푸시는 세례는 물로 의식儀式을 갖추되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성령과 불이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명백한 사실이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례의 진실이다. 요컨대,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고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없이 어떻게 예수를 주라 부르고, 보지도 못한 예수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가?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면서 막상 방언을 하지 못하면 그가 받은 세례는 사실상 ‘거짓 세례’라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할례에 거짓 할례가 없듯이 세례도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세례를 받고나서도 뚜렷한 내적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미숙한 신앙 때문일 뿐, 주께서 베푸신 세례 자체가 거짓일 수 없다.
그렇다면 순복음교단에서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방언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방언을 하든 하지 못하든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처음부터 성령 세례이기 때문에 새삼스레 방언이 성령 세례의 또다른 증거가 될수 없다.
이제, 방언의 실체에 대해서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오늘날 이른바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 있었던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단언컨대 ‘방언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은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고듣는 방언은 은사의 조건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적인 은사는 교회에 덕을 끼치기 위해서 부여받은 은혜의 선물로서, 교회의 공적 목적을 위한 도구다. 신유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한 은사가 아니고 예언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한 은사가 아닌 것처럼, 방언이 진정한 은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 안의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공적인 활용이 가능해야 한다. 이를테면, 초대교회의 방언은 ‘상호소통’을 전제로 전도에 유익한 예언의 기능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방언이 말그대로 언어적인 은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무슨 뜻인지 방언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소통’이 전제돼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은 화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청자는 자기 언어로 들으면서 방언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청자가 직접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통역이 가능한 ‘다른 언어’로서 소통이 가능했고 의미전달이 분명했다.
바울이, 통역하지 못하는 방언은 교회에서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던 의도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다시말해, 통역이 불가능한 방언은 이미 은사로서 의미있는 방언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사사로이 사용하는, 무의미한 방언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소위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를 청자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 듣는 사람의 이해는 고사하고 말하는 사람조차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무슨 영적 유익이 있겠는가? 언어를 통한 영적 유익은 깨달음을 전제하고, 깨달음은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전제한다. 의미가 없는 이상한 언어에서는 어떤 영적 유익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방언은 영적 유익을 끼치는 은사가 아니라, 방언하는 자의 심리적 위로와 만족을 위해서 사사로이 만들어진 ‘특이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돈을 지불하면서 방언훈련을 받고 애써 입에 붙인 사이비 방언이 주께서 주신 소중한 은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심적인 위로가 있다면, 나아가 방언하는 사람들이 즐겨 말하듯이 ‘보다 깊은 차원의 기쁨’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방언의 효용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방언을 통해서 이른바 ‘엑스터시’를 느끼고, 남다른 정신적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종류의 엑스터시에 관한 경험은 비단 방언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은혜가 아니다. 기독교가 아니라 비종교적인 명상을 통해서도 쉽게 얻을 수 있고, 심리적인 방법으로 최면이나 심지어 마인드컨트롤을 통해서도 어렵잖게 얻을 수 있다.
요컨대,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목적은 자기만족이나 자기유익에 따른 심리적 쾌락이 아니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상관없이, 자기 만족과 쾌감을 느끼기 위한 방언은 초대교회의 방언, 다시말해 성경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거룩한 은사로서의 본질적인 ‘방언’이 아니다. 방언이 은사라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능력에 연합하는 분명한 영적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초대교회의 방언과 달리 오늘날 방언이라고 말하는 '현상'은 교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심리적인 위안과 기쁨이 있을망정, 내면의 변화와 성장·성숙처럼 뚜렷한 영적 유익이 없다.
주변에 방언하는 사람들이 많고, 통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나는 그들의 방언에서 어떤 종류의 은사적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통변한다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들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을 보았을망정, ‘다른 언어’의 단어와 구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자기 언어로 옮기는 통역을 보지 못했다.
어쨌든, 모든 방언을 싸잡아 ‘거짓’이라거나 ‘무익하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다. 주변에서 가만히 지켜보건대, 방언을 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보다 열심인 사람들도 많거니와, 왠지 미심쩍었던 ‘구원’에 대해서 방언을 통해서 보다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는 분명히 방언의 긍정적인 기능일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방언은 오순절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증거가 아니거니와,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허투루 과시하는 빌미가 될 수 없다. 덧붙여, 자기 유익을 위한 도구로서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방언의 공적인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 성경적인 방언의 내용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두 방언을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성경에 기록된 원래의 방언은 당연히 ‘방언’으로 남겨두고, 오늘날 즐겨 사용하는 방언이라는 말은 다른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이다. 방언(local language)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늘날의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과 달리, ‘외국어’ 또는 ‘다른 지역의 언어’로서 통역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만족을 위해서, 또는 신앙의 열등감을 외적으로 해결하거나 구원에 대한 자기 확신을 위해서 어설피 방언을 탐하지 말라. 당신이 구하는 방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영적 은사’가 아니라 '육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비록 처음에는 미약할망정, 성령이 내주하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이기 때문에, 몸의 지체가 고유의 기능을 지닌 것처럼 각자에게 합당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져라...
강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