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빼미》 (2022)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고 수일 만에 죽었는데,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의 기록과 함께 영화는 새벽을 앞둔 한 남자가 아이를 등에 업고 궁궐 안을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의 문을 연다. 인조반정이라는 말로 더 유명한 조선의 왕 인조는 자신의 빈약한 정통성을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청나라를 외면한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의 굴욕을 맛보고, 왕위를 이을 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크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세자는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세자는 아버지 임금에게 조선도 문을 열어 서양의 문물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인조는 그런 세자를 향해 네가 보는 눈이 달라졌다며 경계한다. ‘보는 눈’, 이것이야말로 영화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다.
그 소현세자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을 때 사관은 세자의 죽음에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자신의 사견을 더했다. 왜 그는 차라리 없으면 좋았을 이 말을 굳이 역사의 기록에 덧붙였던 것일까? 분명한 이유는 알 길 없으나 사관이 덧붙인 이 한 줄은 이후 불타오른 수많은 음모론의 도화선이 되었다. 영화 《올빼미》 역시 이 한 줄로부터 자신의 영화적 상상을 펼쳐나간다. 영화의 주인공 경수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맹인 침술사로 우연한 기회에 어의의 눈에 들어 궁중에서 일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맹인이 아니다. 낮에는 사물을 볼 수 없으나 오히려 빛이 없는 깊은 어둠에서는 볼 수 있는 주맹증이라는 특이한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숨긴 채 궁에 들어온 경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는다. 궁에서는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조언을 충실히 따르던 경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맞닥뜨리게 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을 때는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 있다는 역설의 주인공과 함께 영화 속 미스터리는 파국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역설적인 절정의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새벽의 빛과 함께 다시 볼 수 없게 된 맹인 주인공은 볼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내가 다 보았다고, 내가 모든 것을 보았다고. 볼 수 있는 자들을 향한 보지 못하는 자의 절규가, 내가 다 보았다는 이상한 절규가 마음을 흔든다. 맹인 주인공의 절규는 선지자의 그것을 닮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선지자들을 시대의 어둠 속에서 홀로 진리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요 9:39)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눈 먼 사람이냐고 예수께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 9:40) 여전히 세상은 자신은 볼 수 있다고 믿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세상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 옛날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올빼미가 되도록 요청받는다.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어둠 속에서 홀로 본 것을 목숨을 걸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옛 선지자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당신의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