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오류의 산증인, 회당장 야이로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허나 소위 믿음이 아주 좋다는 어떤 사람들은 도무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또는 믿더라도 그 오류를 그저 사본상의 사소한 필사 오류나 편집 오류 정도로 경시하고 그 전달 내용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저 타이핑 실수 정도로 보는 것이다.
딸이 죽기 전인가 죽은 후인가
그래서 일단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를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마가복음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막5:22)"라고 말했다. 분명히 딸이 '죽기 전'에 야이로가 예수님께 왔다.
반면에 마태복음은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마9:18)"라고 말한다. 딸이 '죽은 후'에 야이로가 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대체 어느 것이 맞을까.
앞뒤 문장의 흐름과 문맥상 이런 오류는 누가 보아도 사본상의 필사 오류나 편집 오류가 아닌 원문의 내용 오류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가 지닌 성경엔 객관적으로 부인하기 힘든 자체 모순적 오류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거다.
그나마 이 오류는 두 복음서 내용이 서로 충돌하여 자체 모순적이기에 발견할 수 있다. 자체 모순이 아닌 나머지 기록들은 그게 어디까지 사실인지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게다가 이런 모순적 오류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부지기수다. 방주에 들어간 동물 수가 다르다. 모세 장인의 이름이 다르다. 솔로몬의 마굿간 수가 다르다. 두 복음서의 예수 족보가 다르다. 백부장 사건이 다르다. 십자가 일시가 유월절 전후로 서로 다르다. 가룟유다의 땅을 산 사람이 다르다. 십자가 두 강도의 말이 다르다. 그리고 성전 휘장이 찢어진 시점이 다르다.
사소한 오류들이 사소하지 않은 이유
물론 야이로가 온 시점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오류냐고 반문할 수는 있다. 밎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사소한 오류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적어도 그 둘 중에 하나는 사실이 아닌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고대문서의 오류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그건 그리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나머지 내용에 사소한 오류만 있고 더 이상 중요한 오류는 없다고 누가 감히 보장할 수 있나.
더구나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결코 단 한 점의 오류도 없다고 목청 터지게 주장하고 있는 교조적 교단들이 많지 않은가.
'삼국유사'에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가 솟구쳤다는 기록이 있다. 과연 지금 이 말을 사실로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저자의 의도에 따라 역사책에 사실과 다른 설화가 추가되는 건 간혹 있던 일이다. 그래서 삼국유사 전체를 온전히 사실적 역사로 보긴 힘들다. 다른 과장이나 왜곡이 추가로 의심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성경에 오류가 많으니 성경을 모두 믿지 말자는 게 아니다. 다만 이제 교회는 성경에 실제로 오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으니 뭔가는 달라져야 한다는 거다. 교과서가 이미 틀렸는데 참고서를 아무리 달달 외우면 뭐하냐는 말이다.
성경 해석이 달라져야
성경이 무오하다는 절대적 기준이 무너졌으니 이는 당연한 것 아닌가. 우선 성경을 대하는 맹신적 자세가 달라져야 하고, 성경을 해석하던 전통적 방법이 달라져야 하고, 그리고 성경을 전하는 설교가 달라져야 정상이다.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변화는 내가 인용하는 특정 성경 구절이 실제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엄청난 현실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손에 들고 만날 "하나님말씀"이라고 열변을 토했지만 실제 그 속엔 하나님말씀이 아닌 불순물이 다수 들어있다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성경은 정제유가 아니라 원유이고 금광석이 아니라 원광석인 셈이다.
그러니 마치 사이비 부흥회의 강사처럼 자기 입에 맞는 성경 구절만 몇 개 콕 집어서 마치 절대무오한 만고의 진리처럼 함부로 소리치는 건 좀 자제해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성경은 단어 하나나 문장 하나뿐만 아니라 문단 전체를 보며 보다 문맥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유사한 다른 구절들을 반드시 비교하며 종합적으로 검증할 필요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흔히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소년 다윗이라고 알고 있지만( 삼상17:49), 사무엘하의 본래 히브리어 원문엔 "베들레헴 사람인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자루는 베틀 앞다리같이 굵었다(삼하21:19, 표준새번역)"고 되어 있다. 엘하난이 죽인 것이다. 그러니 정말 누가 죽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성경무오설은 경전 우상화
이 글의 결론은 "진리는 진실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짓이나 오류로 얻은 결론은 진리가 아니다. 진실을 인정해야 비로소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종교인들이 만든 성경무오설 따위의 왜곡된 교리가 아니다.
오류가 적지 않은 여러 고대 문서들을 직업 성직자들의 다수결로 정경화하고 그 모두가 절대무오한 하나님말씀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건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건 경전 우상화다. 오죽하면 루터와 칼뱅과 일부 개혁자들은 그 정경 목록에서 에스더서, 야고보서, 요한계시록 등 특정 문서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우리는 현재의 성경에 내용 오류가 적지 않다는 이 놀라운 진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세상에 당당하게 널리 알려야 옳다. 그래야 비로소 거짓된 교리에 휘둘리는 맹신적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질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성경의 진실을 정직하게 알려주는 산증인이다. 그가 죽어가는 딸을 보며 비통한 심정으로 예수를 찾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죽은 딸을 보고 그래도 그 절망 속에서 하늘의 기적을 바라며 예수께 온 것인지 이제 그 진실은 오직 야이로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없어도 아주 속 편하게 잘 먹고 잘살고 있다. 이 혼탁한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그 옛날 갈릴리 예수를 찾아 길거리로 나서야 했던 야이로의 그 절박한 마음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온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