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희망, 새 다짐
일상의 삶을 살아오다가도 우리는 한 시점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초중등학교의 입학과 졸업은 개인에게 큰 의미를 갖지만 고졸과 대졸은 더 큰 부담과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새로운 조직이나 기업에 입사하는 경우에도 큰 기대와 새 결단과 다짐을 하게 된다. ‘처음처럼’이란 문구가 우리 가슴에 기억되기도 하고 술병에 쓰인 글씨로 이해되기도 한다. 본래 이 문구는 신영복 선생의 글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란 <처음처럼>에서 유래한다.
일상의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나 헬라인들이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해 이해하듯이 우리의 삶도 일상의 흐름과 동시에 새로운 희망과 다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먼저 우리의 새 희망으로 나라가 정치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확장되기를 바란다.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이 해소되고 억눌린 자와 억울하게 갇힌 자들이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경제적으로는 국제경제여건에 지혜롭게 대처해 수출입이 확장되고 무역수지가 개선되며 내수경제도 건실하게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사회적으로는 보수, 진보 양진영이 대화, 소통을 확대, 지속하고 언론은 사실에 근거한 정론, 직필로 바르게 여론을 보도,형성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전통 미디어(Legacy Media)는 많은 부분 그 역할과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유형의 언론매체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우리의 언론은 그 존재이유인 사실(Facts)과 진실에 기초한 보도와 논평이 거의 사라지고 진영과 편 가르기에 전념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종교와 교회는 본래의 복음과 가르침을 왜곡하여 정치와 붕당의 앞잡이나 방조자로 전락하고 특히 자본과 돈의 유혹에 나약해져 있다. 어둔 사회의 등불과 후패한 정신세계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할 종교단체는 오히려 세상의 근심과 걱정거리로 치부될 때가 적지 않았다. 교회는 본질적 복음과 가르침에 기반 한 바른 신학과 강론을 통해 흔들리기 쉽고 갈라진 대중의 마음들을 치유하고 화해, 용서하는 근본 가치를 실현하는데 바른 방향제시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 개인 한사람이 맡은 자리에서 소명(calling)을 다하는 참 청지기(steward)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의 자세로 자신의 행동과 조직의 경영을 되돌아보며 혁신하고 미래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니버(Karl P. Reinhold Niebuhr,1892~1971)가 갈파한 것처럼 신앙인 개인은 더 원천적 복음과 참 구원관에 철저하다 하더라도 집단화, 구조화된 조직과 사회는 이기적이고 파당적 행태로 본래의 신앙원리에 벗어난 경우가 많다.
개인 차원에서도 나뿐만 아니라 이웃과 타자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배려하는 기본적 동양의 예(禮)의 정신과 태도가 강조되어야 한다. 망담피단 미시기장(罔談彼短 靡恃己長: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 것이며 자기의 장점을 (지나치게)믿지 말라)란 옛말이 있다. 우리는 자기와 내가 속한 조직이나 파당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남의 단점을 과장하여 비판한다. 심지어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다는 식의 극단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가 강조되어 온 진화론의 현장에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가 책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랑과 같은 감정이나 자기희생 같은 이타적 행동들이 근원적으로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전략’ 이라는 말에 주의하게 된다. 사자에게 잡힌 물소를 동료 물소들이 힘을 모아 구출하려는 행동을 볼 수 있다. 꿀벌은 침입자를 방어하기 위해 침을 쏘지만, 침을 쏘게 되면 내장이 함께 빠지기 때문에 곧 죽음을 맞이한다. 생존 경쟁을 피할 수 없는 물소들이나 꿀벌들이 왜 굳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그런 이타적 행동을 하는지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한 사회나 생명체가 오래 유지, 존속하고 확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이타적 행동이 궁극적으로 유전자를 보전하고 종을 유지,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회진화론적 발견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진영과 이념, 계층과 세대, 종교와 지역 등으로 갈등하고 싸우는 것은 결코 국가와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 대신에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공존과 상생의 가치 더 나아가 상대를 위한 사랑과 자기희생까지도 전체 유전자라 할 수 있는 사회와 국가의 유지,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인식과 그 확장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작의 시점에 우리는 다시 “신사가복 기욕난량”(信使可覆 器欲難量: 믿음은(信) 실천할 수 있도록(可覆) 하고(使), 그릇(器, 도량,度量)은 헤아리기 어렵도록(難量)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한다(欲))란 옛말을 떠올리게 된다. 즉 우리는 남을 배려하는 언행에는 믿음과 실천을 담보해야 하며, 자신의 도량을 크게 가져 남을 이해하는 자세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크심과 깊고 넓으심을 강조하신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 "Can you fathom the mysteries of God? Can you probe the limits of the Almighty? They are higher than the heavens--what can you do? They are deeper than the depths of the grave --what can you know? Their measure is longer than the earth and wider than the sea.)
*인천기독신문에도 기고함, 김홍섭 장로(인천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