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과 요한
빛의 절기인 주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등장인물은 누구일까? 세례자 요한이다. 그는 ‘빛을 예비하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주현절 첫 주일은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는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준 장본인이 바로 요한이었다. 그를 세례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요 1:7)이었다. 빛 자신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고, 그 빛을 믿게 하려는 사명을 지닌 선지자였다. 요한을 빛을 예비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빛은 어둠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마침내 세상은 그를 통해 어둠과 혼돈으로 부터 분별을 얻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어울려 세례 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부모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인데, 그래서 요한의 유대식 이름은 ‘요카난 벤 체카리야’(Yochanan ben Zecharyah)이다. ‘체카리야의 아들 요카난’이란 뜻이다. 사가랴라는 표기는 순전히 한국식이고, 요카난에서 요한으로 바뀐 배경도 마틴 루터가 그리스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부터이다.
요한이란 이름은 너무나 유명한 탓에 꼭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으로 구분해야 한다. 정교회 제단에는 반드시 정면에 네 명의 초상을 그린 커다란 성화상(이콘)이 있는데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편에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좌우 가장자리에 오른쪽은 세례 요한과 왼쪽은 예배당의 주보성인이 놓인다. 예수님 곁에 위치한 세례 요한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신약 시대의 첫 전도자였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이 나뉘는 분기점에 존재한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했던 예언전통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였다. 이사야가 고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든, 말라기가 전한 선지자 엘리야의 재등장이든 모두 세례 요한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단호히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마 11:14)임을 보증하셨다.
세례자의 위대성은 4복음서의 기록자가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룬 데서 드러난다. 그는 시대정신에 밝은 경건한 의인이요,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고발하는 뜨거운 불꽃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당시 시대정신이 바로 죄로부터 회개이고, 임박한 심판임을 증거하였다.
두 요한 덕분에 요한이란 고유명사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름이 되었다. 아주 흔한 남자이름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존(영어), 에반(스코틀랜드어), 요한네스(독일어), 장(프랑스어), 죠반니(이탈리아어), 후안(스페인어), 얀(노르웨이어), 이반(러시아어), 심지어 우리나라 이름에도 요한이 있다.
조선 천주교에서는 한문으로 세례 요한은 약한(若翰)으로, 사도 요한은 약망(若望)이라고 표기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세례명인 바로 그 약망이다. 나중에 초기 개신교는 약한(約翰)이라고 적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에서 세례자 요한은 요안으로, 사도 요한은 한글로 요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천주교와 개신교, 세례자와 사도의 이름 모두 요한으로 부르게 된 것은 공동번역성경 출간 이후다.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 두 요한은 모두 빛의 갈림길에 선 인물로 평가 받는다. 프랑스 속담에 “두 요한이 일 년을 나눈다”는 말도 있다.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빛을 증거한 까닭에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하지이고, 사도 요한의 축일은 동지가 된 셈이다. 세례 요한이 하지의 성인이 된 까닭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란 고백 때문이다. 그 이유로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 하지의 주인공으로 산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과 도로가 있다. 그럼에도 길이 없는 광야로 나서는 사람은 남다르다. 만약 세례 요한처럼 스스로 작아지고, 스스로 낮춘다면 비로소 내 안의 믿음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까? 보물지도처럼 드러나는 그 길을 통해 어둠 속에서 빛으로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현절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