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가고 토끼 오다.
어! 하다 보니 새해를 맞았다. 싱거운 새해맞이다. 코로나 지속으로 성탄 전야예배와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지 않고 넘어가니 연말과 연시 기분도 영 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라도 있었다면 기분을 좀 느꼈을까나? TV마저 없으니 조용하고 심심한 날들이었다. 이렇게 2022년은 호랑이처럼 훌쩍 달렸고, 2023년도 토끼처럼 폴짝폴짝 뛸 것이다. 정신을 제대로 붙잡아 놓지 않는다면 뛰고 달리는 속도에 또 어! 하다 한 해를 놓치고 말 것이다. 한 해 한 해 먹을수록 나이의 속도만큼 세월이 달려간다는 어른들의 말이 실감한다. 나도 어느새 52세! 현 정부 덕분(?)에 나의 시간은 한 해 거꾸로 간다. 그래도 시간은 호랑이처럼 달려가고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갈 것은 분명하다.
지난 한 해는 매우 힘들었다. 시간은 흐르나 마음은 멈춰선 듯 나아가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사역도 그렇고, 개인적인 일들도 이리저리 꼬여 풀리지 않은 시험문제처럼 씨름만 하다 말았다. 결국 12월 말이 되어도 문제는 풀지 못하고 새해 1월을 맞은 것이다. 작년 농사는 어떠했는가. 콩 타작은 12월 초순에 부리나케 마쳤다. 겨울 시작과 동시에 한파가 찾아왔던 때여서 타작을 했어도 썩 반갑지 않았다. 시기도 그렇거니와 500평 남짓 땅에서 고작 한 자루를 얻었다. 그 한 자루도 고르지 못하고 성하지 못한 콩들이었다.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아서 실망도 없었다. 반면 타작을 해준 콤바인 업자는 오히려 미안해했다. 농부의 수확이 크고 많아야 자신도 기분이 좋은데 그렇지 못하니 난감함이 얼굴 가득해 보였다. 기계 정리도 안하고 계속 내 옆에서 걱정을 해주었다. 1평에 1킬로나 0.8킬로 정도는 수확해야 하고, 거름도 많이 주어야 열매가 실하고, 제때 풀을 거둬주고 물을 주어야 농사가 잘된다고 거듭해서 설명해주었다. 그것을 낸들 모르겠는가. 걱정해주는 업자에게 쿨하게 괜찮다고 하며 겨우 돌려보냈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창고 한켠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콩 한자루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그 이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뭐, 쳐다볼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렇게 콩도 별반 수확없이 한 해 끝자락에서 마쳤다.
한 밭 가득 농작물들을 수확하고 나면 내년 농사를 위해 비닐을 거둬주는게 좋고 또 편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갑작스런 추위와 12월에 서너 번 함박눈이 무섭게 내리면서 해야 할 숙제를 마치지 못했다. 아직도 눈은 쌓여있고, 겨울은 두어 달 남았다. 그러면 눈이 녹고 땅이 물러지면 그때나 숙제를 할 수 있다. 농한기라 해도 쉬어도 쉬지 못하는 똥 마련 강아지마냥 낑낑대다 봄을 맞을 지경이다. 한 두 평도 아닌 거의 천여 평의 비닐을 거둬야 한다. 아마 올봄엔 비닐을 걷고 작물 한두 개 심다보면 어랍쇼! 벌써 봄 끝자락이야? 하며 탄식을 할지 모른다. 그러지 않으려고 벌써부터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콩은 작년으로 마치려 한다. 인생사 삼세번이라 하여 한번 더 지으려 했는데 창고 안의 콩 한자루가 여전히 마음을 할퀸다. 그러고보니 콤바인 업자에겐 쿨했는데 자신에겐 뒤끝 작렬이다. 그리고 겁이 난다. 더 잘 지을 용기도 없다. 52세에 혼자 그 많은 땅의 비닐을 걷고, 거름주고, 트랙터치고, 고랑 내고, 다시 비닐 덮고, 작물 심고, 헛골 풀 관리 하는 등을 하려고 하니 엄두를 못 내겠다. 여기에 공동으로 짓는 논농사도 준비해야 한다. 또 콩이란 것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작물이다. 콩을 원료로 하는 공장에 보내지 않으면 그 많은 콩을 어찌 처리하겠는가. 그래서 결론은 콩에서 참깨나 들깨로 전향하기로 했다. 작년에 참깨와 콩밭을 휘젓고 돌아다녔던 토끼가 이 겨울 어디에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모르나 따뜻한 봄이 오면 분명 어딘가에서 폴짝폴짝 뛰어나와 내 밭을 도륙(?)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고라니도 토끼도 새들도 싫어하는 들깨를 심어서 훠이훠이 쫓아내 보리라. 이러다 정작 봄이 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삼세번? 콜! 콩 한 번 더 심자^^ 여하튼 호랑이는 갔고 꾀 많은 검은 토끼가 왔다 하니 나도 그 꾀를 빌어 다시 농사에 도전해 보자.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