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 (Offret, 1986)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감독’이라는 명성을 지닌 러시아의 시인이자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은 영상 차체가 시이며 내용조차 은유의 성격을 지닌 그런 영화다.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 후반작업을 병상에서 마무리했어야 할 정도로 폐암과 싸우며 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인류의 구원과 희생이라는 심오하고도 고전적인 신앙의 주제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적 명상은 한 아버지가 죽은 나무를 바닷가에 세우며 아들에게 전설을 말해주는 장면과 함께 시작된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먼 옛날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쉬지 않고 물을 주어 마침내 꽃이 피도록 만든 한 수도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늘 꾸준하게 의식과도 같이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 거야. 암, 변하지, 변할 게 분명해. 만일 어떤 사람이 정확히 아침 7시에 일어나 욕실로 가서 물을 한 잔 받은 후에 변기 속에 붓는 일이라도 매일 계속한다면 말이다.” 단순함과 숭고함, 거룩함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이 말은 앞으로 영화 속에서 벌어질 모든 사건에 대한 예언과 화두가 된다.
2시간 반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의 영화지만 줄거리는 꽤나 간단하다. 지구의 종말을 가져다줄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주인공 알렉산더는 만일 신께서 세상을 구원해주신다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를 구원해주신다면, 어제 또는 오늘과 같은 아침을 다시 허락하신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사랑하는 가족도 집도 아들도 버리고 평생을 벙어리로 살아가겠다고,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서원한다. 그러자 우체부 오토가 알렉산더를 방문해 세상을 구원할 실로 말도 안 되는 비법을 알려주고, 알렉산더는 이를 전심으로 실행한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다음 날 아침, 과연 그 비법을 실행한 덕분인지 알 길이 없지만 알렉산더는 신에게 약속한 대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의미로 자신의 집을 불태워버린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에 대한 은유, 이성과 신비의 대결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한 인간이 고대의 사형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처럼 비논리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 이상한 생각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했고, 그리스인들은 이성적이지 않다고 거부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신앙은 이성이 멈춘 곳에서만 시작되는 신비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는 분명 매우 지루할 것이 틀림없다. (일생에 한번쯤은 꼭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이 영화를 아직 감상하지 못 한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이 ‘매우’라는 단어를 강조해야만 한다. 앞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될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예방주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5초마다 장면이 전환되는 ‘빠름’에 익숙해져버린 현대인들에게 5분, 10분 동안 카메라의 움직임조차 없이 한 장소가 비춰지는 것은 생각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이런 식의 롱테이크를 통해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소중한 진리는 빠름 속에 있지 않아. 느림과 멈춤에 있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의 시작에 아버지와 함께 등장했던 아이가 홀로 힘겹게 두 양동이의 물을 길어 아버지와 함께 바닷가에 심었던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아리아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가 흐르고, 아이는 나무 아래 누워 죽은 나무 가지들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왜 그런 거죠, 아빠?” 그러게,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