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기후!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할 터인데 요즘 느껴지는 날씨는 오월의 따뜻한 봄과 같은 푸근함이다. 낮은 따뜻하기도 하고 조금 움직이면 땀이 날 정도로 덥기도 하다. 그리고 아침저녁은 싸늘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춥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엊그제 비가 내리긴 했지만 그래도 포근하다. 다음 주에 영하로 떨어질 만큼 추워진다고 예보는 하지만 그 예보의 정확도는 그때 가봐야 가늠할 수 있다. 예년만 해도 지금과 같이 11월 말경에 비가 내리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는 채비를 하였는데, 올해는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1월 초 반짝 추위 속에 연탄보일러를 피웠다. 덕분에 새집의 방안 기온은 20도로 아주 따뜻하게 만족하며 보내고 있다. 간혹 훈훈한 공기가 방안을 가득 채울 때 기분좋게 창문을 열기도 하지만 이내 문을 닫는다. 간신히 모아둔 훈기를 일부러 빼는 것도 아깝다 여겨 더운 공기 안에서 옷을 가볍게 입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다. 혹여 집안이 춥다고 느껴지면 일부러 바깥에 잠시 나갔다 온다. 그러면 안과 밖의 기온차가 있기 때문에 춥게 느껴졌던 방안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일종의 에너지 절약인 셈이다. 보일러 온도를 높이느니 내 몸을 온도계로 만드는 것이다.
수상한 날씨요 계절이다. 계절마다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있다. 봄은 농사를 시작하게 하고, 여름은 자라게 하며, 가을은 영근 열매를 수확한다. 그리고 겨울은 땅과 농부가 쉬도록 하여 내년을 준비하게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계절의 선물이 자꾸 엉망진창 무너지고 있다. 농사를 시작하나 가뭄이 찾아와 씨앗 심기를 주저하게 한다. 농작물이 자라기는 하지만 너무 많은 비가 내려 작물이 자라기만 했지 열매를 수정하는데 많은 고생을 한다. 그러다보니 쭉정이가 잔뜩이라 가을에 건지는 것이 별로 없다. 올해도 많은 작물들이 생각했던 것에 훨씬 못미치는 수확이었다. 농사를 잘 못하는 나도 그렇거니와 농사를 아주 잘하는 농부의 소출도 많이 줄었다. 아, 늘어난 것이 있다. 풀이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풀은 제크의 콩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무한정 뻗어나갔다. 거기다가 다가오는 이 겨울, 날씨가 수상하다. 따뜻한 기온이 계속된다. 그렇게 되면 병충해 예방이 되지 않는다. 벌레가 야호! 하며 판을 칠 것이 분명하다. 몇해 전도 이와 비슷했다. 겨울이 따뜻하여 그해는 그 어느 때보다 병충해 피해가 심해 과수나 작물들이 맥을 못추었다.
요즘 이웃 농부 집에 마실을 가면 먼저 하는 인사가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걱정이라는 말이다. 날씨가 따뜻하여 이웃 농부는 마늘과 양파를 9월 말 그러니까 여느 해보다 한달 일찍 심었다. 그랬더니 싹이 벌써 성인 검지손가락 크기만큼 올라왔다. 겨울 대비로 비닐을 씌우는데 싹이 다칠까 꽤 조심하며 덮기도 했다. 김장을 일찍 마쳤지만, 사실 예전에는 김장도 12월 추운 바람을 맞으며 치렀다. 일찍 마친 김장김치는 아직 이웃집 저온 냉장고에 보관중이다. 김칫독을 땅에 묻었으나 바깥 기온이 너무 따뜻해서 가져오지도 못하고 묻지도 못하고 남의 집 신세를 지고 있다. 겨울의 찬바람과 눈바람을 막으려고 위풍당당 세워 놓은 깻단이 이 겨울에 제대로 쓰임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니 왠지 초라하게 보였다. 그리고 과연 김칫독에 김치를 묻을 수 있으려나. 비움의 일상을 추구하려 했던 내 다짐과는 달리 김치냉장고를 사야 하는 것은 아닌지 슬슬 고민이 되기도 하였다. 김장을 하지 않은 것이 나았을까. 무슨 바람이 불어 30포기나 하였을까. 따뜻한 기온으로 김치만 병나게 생겼다. 김치뿐인가. 처마에 매달아 놓은 감은 곶감이 되려고 안감힘을 쓰는 듯하나 여전히 말랑말랑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것 같고, 무청은 시래기를 만들려고 매달아 놓았으나 누리끼리하게 바래기만 한다.
계절의 제맛을 느끼고 싶다. 따뜻한 봄, 더운 여름, 청명한 가을, 추운 겨울을 제대로 맞고 싶다. 계절마다 달마다 우리에게 선물하는 자연의 조화가 한꺼번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순차적으로 피고 지었으면 한다. 24개의 절기에 따른 농법이 무너지지 않고 순리대로 농사를 지었으면 한다. 아무리 첨단과학에 따른 농사가 편리함을 준다고 하지만 해와 달과 바람과 비와 공기와 물 등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얻은 농산물의 맛을 어찌 대체할 수 있을까. 농부는 하늘의 움직임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늘이 어떠한 기후를 내려도 군소리없이 묵묵히 받아들이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맞는 기후는 우리의 책임이 크다. 지구가 몸살을 겪고 있으나 우리는 지구의 몸살이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며 산다. 지구의 몸살에 직격탄을 맞는 사람들은 바로 농부들이다. 하늘의 기후에 순종하며 산 그들이었지만 현재와 같은 기후 위기에는 농부도 호미와 낫을 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요즘같이 수상한 계절에는 날씨가 좋아도 걱정, 나빠도 걱정이다. 따뜻한 늦가을, 따뜻할 겨울.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걱정을 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이런 말도 나올 수 있다. 아, 농사를 짓고 싶으나 기후가 돕지 않는구나. 기후야 제발 돌아와다오.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