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시스트》 (Exorcist, 1973/2000)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나와 달리 내 동생은 공포영화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나는 무서운 이야기나 장면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심경을 어지럽히는 까닭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공포영화 같은 종류는 보지 않는 편이지만 동생은 별로 큰 영향 없이 공포영화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동생이 처음으로 무섭다고 느꼈던 영화가 바로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고전 《엑소시스트》였다. 동생은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무섭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무려 거의 5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무슨 힘이 있는 것일까?
초현실적인 영적 존재나 극도의 폭력, 위협, 긴장 등을 통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공포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수없이 제작되고 상영되는 영화의 장르다. 하지만 많은 공포영화들은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리와 영상들로 도배되어 영화적 감동에까지는 이르지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음을 잘 내지르기만 하는 것이 가창력이 아니듯 신경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만이 공포영화가 아닐 텐데도 수많은 공포영화들은 자극과 수준을 혼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엑소시스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를 보여준다. 바로 불가해한 악의 성격을 우리 눈앞에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공포를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는 악의 존재 이유와 그 본질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심오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의 엑소시스트, 즉 구마사(驅魔師)는 가톨릭 사제들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영화는 12살 된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는 두 명의 신부와 귀신의 대결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토대가 된 1971년의 동명소설은 1949년 미국 메릴랜드에서 있었던 14살 소년의 실제 구마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개봉 당시 《엑소시스트》는 공포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수익인 1억650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1999년 <피플>과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선정한 가장 무서운 영화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개봉 후 거의 30년이나 지난 2000년 9월에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1973년판에서 삭제되었던 몇몇 장면들과 함께 <당신이 결코 보지 못했던 버전>이라는 부제를 달고 감독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새롭게 개봉되기도 했다.
2000년 판에 새롭게 추가된 장면 중에는 첫 번째 구마 시도 직후 두 신부가 계단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집요한 심리전을 펼치며 인간을 공격하는 귀신과의 치열한 한바탕 전투가 끝나고 짧은 휴식의 순간 젊은 신부 카라스는 노련한 구마 신부인 머린 에게 묻는다. “왜 이 소녀입니까?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악에 대한 젊은 신부의 질문에 노년의 신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요점은 이런 게 아닐까? 우리를 절망시키고, 우리 자신을 추한 동물로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게 하려는 것이겠지.” 이처럼 자신과 신에 대해 회의를 일으키게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근원적 악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야말로 《엑소시스트》를 여타의 흔한 공포물과 차별되게 만드는 요소였던 것이다.
절망하는 만드는 것, 자신을 추한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것,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악이 지니고 있는 힘이다.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 공포는 신과의 극단의 거리를 인식하는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추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익숙한 일인가? 열등감이라는 마귀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머린 신부의 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나 자신을 추한 존재로 보게 만들며, 그로 인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도록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가능성이 차단된 채 절망으로 뒤덮인 인생은 공포영화 그 자체가 아닐까? 인생을 공포영화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열등감이라는 마귀를 반드시 쫓아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