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에 대한 기억
김장의 계절이 왔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김장은 한 겨울을 나는 일용할 양식이자 비상식량을 준비하는 것으로 집 안의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집집마다 12월 초순, 겨울 방학을 맞기 두 주 전부터 김장은 시작됐다. 엄마는 시장이나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리어커 장수에게 배추, 무, 파 등 김장에 들어갈 재료들의 가격 흥정을 하셨다. 조금 더 싸고, 조금 더 크고 신선한 채소를 준비하시느라 김장하는 날 이전부터 준비를 하시는 것이었다. 가격 흥정이 안되면 다른 채소를 슬쩍 얹어 달라고 하면 상인은 남는 것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못 이기는 척 넘겨주었다. 집안에 배추를 비롯한 김장거리가 쌓이면 본격적으로 김장이 시작되었다. 다듬고 씻고 썰고 절이고 헹구고 건지고 무치는 행위가 끝나면 그 다음은 아버지의 손길이 바빠지시는 차례였다. 아버지는 마당 한 귀퉁이를 파고 커다란 독을 몇 개 묻으셨다. 그곳엔 엄마와 우리가 빨갛게 무친 김장이 겨우내 담기는 것이다. 김장 김치는 겨울내내 밥상에 올랐다. 첫 날은 푸짐한 밥상이다. 어려운 때였지만 그날만은 보쌈과 삼겹살로 김장 파티를 열었다. 꿀맛이었다. 그리고 김치는 국으로, 찌개로, 볶음으로 그리고 김치말이 국수 등의 다양한 조리법으로 겨울을 났다. 하이라이트는 설날이 다가올 때 만두소로 끝장을 내는 것이다. 곧 다가오는 봄기운에 김치에서 군내가 나기 전 해치울 수 있는 쓰임새로 만두 만큼 요긴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어릴 적 기억엔 김장을 거의 300포기는 기본으로 하였던 것 같다.
시절이 지났다. 몇백 포기를 기본으로 하였던 김장은 옛말이 되었다. 요즘은 많아야 30포기 정도 하지 않을까?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외벌이가 맞벌이로, 다자녀가 외동으로의 가족 구조로 바뀌면서 김장 모습도 바뀌어 가고 있다. 또 마트에 가면 여러 기업의 김치를 입맛에 맞게 고를 수 있고, 365일 같은 맛으로 쉽게 맛볼 수 있는 편리함이 있으니 김장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을 수 있겠다. 나 같아도 최근 몇 년 동안 김장은 거의 생각 않고 살아왔다. 특히 혼자서 있다 보니 많은 양의 김장은 엄두도 못내고, 한 만큼 먹을 자신도 없어 점차 김장에서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겠다. 그래서 음성에 처음 왔을 때인 2013년에 직접 수확한 배추 10포기로 했던 김장 외에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이후에는 이웃에서 혹은 교회에서 담가준 김치통 한 통이면 한겨울 충분히 먹고도 남았다. 올해도 그렇게 유야무야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이웃에 사시는 반장님네가 함께 김장을 해보자고 제안을 하셨다. 배추 10포기! 솔깃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김장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이유는 반장님네는 많아야 30포기 아니라 100포기를 하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 번이니 나눠서 200포기를 하는 셈이다. 게다가 나는 몸만 가서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유혹이 감미로웠다.
말이 100포기지 직접 담가보니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첫날은 밭에 가서 배추와 무를 뽑았다. 농사를 얼마나 잘 지셨는지 배추가 내 상반신만 했다. 무도 내 팔뚝보다 크고 굵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장에 들어갈 모든 재료는 반장님네 밭에서 거둔 것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크고 깨끗하고 맛있었다. 재료들이 크니 힘도 그만큼 더 들었다. 어디 가서 꾀를 부리는 성격이 아닌 나는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발사하여 불태웠다. 그리고 나이가 어느 정도 차니 일머리가 생기는 것도 한몫 했다. 첫날 김장 준비 과정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난 뒤 앉으니 저절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순간 졸았는데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달게 느껴진 잠이었다. 최근에 일하면서 이 정도로 몸을 불사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노곤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나는 단 하루 옆에서 보조로 도왔을 뿐인데도 집에 오자마자 고꾸라졌는데, 매해 평생을 몇백 포기 하셨던 엄마는 김장하는 날에 얼마나 고되고 피곤하셨을까. 그 노곤함 속에서 자식으로서,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았다.
나는 횡재했다. 이틀 도와주고 맛있는 김치와 겉절이를 이번 겨울 먹고도 남을 만큼 얻었다. 함께 김장을 했던 분들도 나처럼 얻어갔다. 주는데 아낌없는 반장님 댁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호의를 평소에도 엄청 베푸시며 사시는 두 내외를 옆에서 지켜보며 감탄할 때가 많다. 있는 것을 모두 내어주어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시는 모습이 놀랍다. 있어서 나눈다, 같이 나누면 좋다, 덜어주면 더 생긴다고 웃으시며 하나에 둘을, 둘에 서넛을 더 담아주시려 한다. 그분들 덕에 나는 평소에도 자주 횡재를 한다. 나도 배웠다. 처음엔 김장 10포기에 마음이 기울었지만, 이틀 동안 옆에서 도우면서 둘이 하면 혼자보다 낫다는 것과 손을 펼치면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진리를 다시금 배우고 느끼고 경험하는 귀하고 값진 시간이었다. 그래서 김장의 고단함을 잊는 것은 아닐까.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