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의 생명을 살린 커피믹스
누가 나에게 추천해줄 드라마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이유와 이선균 주연의 ‘나의 아저씨’를 소개한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몇 번을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아내와 딸이 굉장히 놀라고 생소해했다. 힘들고 소외된 약자의 곁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힘이 될 수 있는지, 누군가를 지지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밖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드라마이기에 교회공동체의 일원들이 꼭 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연 많은 주인공 이지안(아이유)이 회사 탕비실에서 커피믹스를 몰래 한 움큼 챙기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허름한 달동네 집, 쓸쓸한 방안에서 가지고 간 커피믹스 2개를 컵에 털어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 장면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가난한 이지안에게 커피믹스는 부족한 식사대용, 간식대용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인기 있던 한국드라마 ‘수리남’에서도 커피믹스가 등장한다. 주인공 강인구(하정우역)가 수리남에 가서 홍어사업을 할 때 수리남 군인에게 한국 커피믹스를 상납하며 정착해가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배경연도는 2000년도 초반이다. 20년 전에도 커피믹스는 지금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커피였다.
최근 커피믹스가 큰일을 했다. 봉화광산 지하 190m에 매몰되었다가 221시간 만에 구조된 작업반장 박정하씨(62)와 보조 작업자 박모씨(56)의 생존에 미리 챙겨간 커피믹스 30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두 광부가 희망을 잃지 않고 구조의 시간을 버텨낸 것은 서로 의지하며 격려하는 것 외에도 당과 지방 탄수화물 등 50칼로리 열량이 든 커피믹스 때문이었다. 첫날에는 빨리 구조될 줄 알고 2개를 저녁밥으로 생각하고 갱도에서 떨어지는 물에 타 마셨고 후에는 하루에 한 개씩, 허기가 지면 하루 2-3개씩 물에 타서 마셨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커피믹스가 소진되었고 나머지 일주일은 암벽에 흐르는 물로 버텼다고 한다. 커피믹스 덕분에 구조될 때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하게 두발로 걸어서 나왔다.
커피믹스는 미군의 전쟁식품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뜨거운 물만 부어 마시면 되도록 커피와 연유를 섞어 졸인 제품이 개발된 것이 믹스커피의 원조였다. 그러나 맛이 별로 없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1차 대전 당시 보급이 쉬운 분유가 탄생하면서 전쟁에 지친 미군을 위로하는 참호 속 기호식품으로 재탄생했다. 2차 대전 때는 동결건조 기술이 개발돼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미국에서 탄생한 커피믹스는 한국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제조사인 동서식품은 전 세계 최초로 커피가루와 분말 크림, 설탕을 사각형 파우치 한 봉에 넣은 커피믹스를 개발했는데 지금의 스틱형 커피믹스는 1987년에 출시되었다. 이 당시 커피믹스는 고급제품이라는 인식, 그리고 아웃도어제품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직원들이 많이 해고되면서 스스로 커피를 타서 마시는 문화가 확산되고 냉온수기의 설치가 일반화되면서 간편성이 뛰어난 커피믹스의 수요가 확대된 것이다.
커피믹스는 외국 관광객들의 쇼핑 리스트 1위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직장이든 탕비실 비치 필수품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알프스나 돌로미티, 네팔 히말라야 등에서 활동하는 외국 산악인들이나 네팔 세르파들도 모두 한국 커피믹스를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인정한다.
커피믹스의 '카제인나트륨'의 ‘화학적 합성품’이라는 이유로 유해성논란이 있었지만 2012년 식약청에서 하루섭취 허용량에 제한이 없을 만큼 안정성이 입증된 첨가물이라며 무해성을 인정했다. 카제인나트륨은 단백질의 함량이 92%이상이며, 필수아미노산 조성이 매우 우수한 성분이다. 커피믹스 한 봉엔 설탕 5~6g이 들어있다. 한국소비자원은 당류 함량이 높은 커피믹스 제품을 하루 2잔 마셔도 WHO 1일 권고량의 30% 수준을 섭취하게 된다고 하니 하루 한 두잔 마시는 것에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커피믹스 중에서 맥심의 브랜드 점유율이 80.8%(2020년 기준)이다. 맥심의 대표 제품 중 1989년 선보인 노란색 맥심 모카골드마일드는 30년 넘게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장수 제품이다. 최근 출시된 슈르림골드는 MZ세대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다크한 커피의 진한 풍미 이후에 부드러운 라떼크림의 맛이 입을 감싼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맥심커피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체험해보길 추천하는 바이다.
임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