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 뭘까요?"
신현희
문제를 안고 찾아온 이들이 어김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자신을 찾아온 환자에게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의사처럼, 고장 난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들고 서비스 센터에 방문한 사람을 맞이하는 수리 기사처럼 대처할 수 없는 이유는 목사가 하나님이 아니라 가련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늘도 문제를 들고 해결도 못할 목사를 찾는다는 것이 문제다. 딜레마다. 척척 해결해줄 수 있는 유능한 목사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저들이 한 아름 들고 온 대인 관계, 금전, 경력과 지위에 관한 문제는 대부분 '내게 있는 것'으로 줄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이거나 사람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조 섞인 성찰을 하자면 '오죽하면 목사에게 왔겠나?' 싶다. 은과 금은 없었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의 능력 있던 초대교회 사도들과는 달리 요즘 교회는 은과 금은 있는데 결정적으로 예수 이름의 능력 잃어버린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말도 듣는다.
'이렇게 하기로 하죠!'라고 섣불리 답을 내리는 것은 대부분 ‘사기’에 가깝다. 그렇다고 '당신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고 나는 모르겠으니 돌아가시오'라는 식으로 응대하는 것은 목회 양호의 차원에서나 도의적 측면에서나 어긋난다. 그래서 찾아온 사람의 푸념과 하소연을 그냥 듣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것이 이른바 상담학에서 말하는 내담자 중심요법(client-centered therapy)이라고 에둘러 칠 수도 있겠다. 듣고 있다 보면 답답함을 토로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 앞에 읍소하는 식이 되다가 스스로 돌이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이제 좀 후련하다’고 심지어 ‘치유 된 것 같다’며 돌아가는 고마운 사례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는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 성서를 관통한 나름의 모범 답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삶의 목적 있다. 레위기법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19:2)
하나님께서 명하신 구별된 삶의 관점(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과 삶은 이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에서 보면 내가 하고 싶지만 해서는 안 될 일과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은 분명해진다. ‘예수님처럼’이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같은 고전적인 질문은 이를 단순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삶의 방식도 제시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명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
설교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말씀은 적어도 먹고 살기 위한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에게 주님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통치)이다.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내 뜻이나 내 소견에 옳은 것(義)를 추구하며 살아가지 않고 다만 그분의 뜻과 공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삶의 결과도 있다. 바울은 음식규정을 둘러싼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결론지으며 이렇게 권고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은 영광을 스스로 취하시지만 또한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중심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추구는 응당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입장이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마태복음 5장 16절처럼 뚜렷하게 보여주는 구절을 찾지 못했다(분명히 말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찾지 못한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보다 자세한 지침도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16-22)
그러나 문제는 이런 말은 답이 될 수 없다는데 있다. 섣불리 성경말씀 들이대며 답을 내려주는 방식은 초보 상담자의 흔한 실수다.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정답’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치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 “국-영-수 교과서와 EBS 교재를 중심으로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해! 부족하면 과외나 학원을 다니는 것도 필요하겠지...”라는 식의 영혼 없는 대답처럼 여겨지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그들의 질문 앞에는 이런 괄호가 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뭘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구체성과 유일성을 담고있어야 했다. 나를 보며 대답을 바라고 있는 한 청년에게 대답했다.
“너 왜 거저먹으려고 하냐? 왜 무임승차하려고 해?”
“네?”
“너 맛집에 가본 적 있어? 대부도에 수많은 바지락 칼국수집이 있지만 까치 할머니네는 독보적이다. “맛집 가봤니? 사람들이 가서 맛있으면 보통 이런 반응 보이더라. 레시피를 궁금해 해. 그래서 물어보거든... ‘이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죠?’ 그럼 알려주나? 맛집의 바쁜 점심시간에 그런 말 같지 않은 질문에 대답할 시간 없어. 대꾸도 안한다. 그런데 올 때마다 지긋지긋하게 물어보면 귀찮다는 듯이 ‘이거 이렇게 저렇게 넣고 얼마동안 끓여내면 돼’하고 알려준다고. 그러면 ‘그거 알았다’며 가서 얼른 만들어 봐. 그 맛이 날까? 날 리가 없지. 왜? 정작 중요한 건 안 알려줬으니까. 맛집의 비법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냐. 그러면 가서 또 묻는다. 비법이 있지 않냐고, 웬만해서는 알려주지 않는 비법도 방송3사 앞세우고 가서 카메라 들이대면 못 이긴 척 말해줄거야. ‘아~ 이건 말해주면 안되는데... 며느리도 모르는데...’하면서 말해 줄거야. 그제서야 비밀을 싸고 있는 봉인이 해제된 줄 알고 가서 만들어보면 그 맛이 날까? 이번에도 그 맛은 안 나. 신기하지. 그런데 놀랄만한 사실은 그 맛의 비결을 주인도 모른다는거야. 가르쳐 주고 싶어도 가르쳐 줄 수 없는거지. 그러지 말고 가르쳐달라면 ‘그냥 하는건데?’ 그냥 하는게 비법이었던 거야. 오랜 시간 장사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습관으로 밴 조리법, 신체의 일부처럼 손에 익은 주방기구들과 좋은 식자재를 공급해주는 믿을만한 거래처가 있을 때 거기서만 나올 수 있는 맛이니까.”
길게 말해봐야 결국 너를 향한 하나님의 뜻! 모른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처럼 말해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면 그제야 깨달을 수 있기에 계시다.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구해도 다 알 수 없어서 일평생 구해야 할 하나님 뜻인데, 넌 왜 단숨에 그걸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하냐?”
무능하고 어설픈 상담자는 결국 애꿎은 내담자를 혼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