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10월의 마지막 날 아침, 10월 달력을 뜯었다. 어느덧 한 해의 4분의 3을 훌쩍 넘기고 두 달 남았다. 11월 달력을 물끄러니 바라보니 빨간 날 나흘과 검은 날 스물여섯이다. 네 번의 주일과 스물여섯 번의 평일이다. 개인적으로 11월 달력이 좋다. 쉬는 날이 많은 것은 일하는 사람으로선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11월은 왠지 깨끗하고 환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바쁜 농사일도 천천히 마무리를 지어가게 하는 달이기도 하고,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조용히 맞도록 종용케 하는 느낌이라서 좋기도 하다.
지난 토요일 오전, 지인과 베었던 들깨를 털었다. 들깨 터는 일도 둘이서 하려고 하였는데 서로에게 피치 못할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혼자 부리나케 털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시간만 애쓰자고 스스로 독촉한 결과 정말 두어 시간 만에 일을 마쳤다. 혼자 털 수 있는 양이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몇 날 고생할 일이었다. 깨를 터는 중간중간 허리를 펴고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아! 나의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이 깊어가는 가을이었다. 여기저기 울긋불긋, 색색이 물들어가는 자연의 모습이 황홀케 했다.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감사도 넘쳐났다. 흥이 돋우니 깨 터는 막대기도 흥에 겨워 움직여졌다. 탁탁 탁탁! 투두둑 투두둑! 톡톡톡! 깨를 털 때마다 바닥에 깐 천막천 위로 깨 떨어지는 소리도 흥겨웠다. 들깨향이 진하게 코끝을 스쳐갔다. 벨 때는 작아 보였는데 털고 보니 알도 제법 굵었다. 기분 좋은 일이다.
모두 털고 자루에 담았다. 한 말 반 정도. 지난번 벨 때 기대하고 예상했던 딱 그 양이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무게가 나간다는 것이다. 같은 양이라도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이번엔 좀 묵직하게 느껴지는 양이었다. 이것마저 기분이 좋았다. 기름을 짠다면 얼마나 나올까? 330미리 병 8개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면 지인과 반반 나눠 4병씩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난 들기름보다 참기름을 좋아하긴 하지만 올해처럼 고생하여 얻은 들기름은 마구마구 허비(?)하며 먹어야겠다. 나물도 무쳐먹고, 두부와 부침개도 지져먹고....
들깨 터는 밭 옆은 복숭아 과수가 있다. 내가 들깨를 털고 있는데 동면이 들어서기 전에 복숭아나무를 정리하는 농부님이 오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복숭아를 딸 때마다 우리 밭을 보면서 한두 번 풀을 베어주면 들깨 소출이 더 늘텐데 그렇지 못해 많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나도 그분의 말에 동의하면서 내년엔 좀 신경을 쓰겠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농사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나이가 70이 가까운 분이었는데,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올해처럼 많은 비는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만약 올해와 같은 비가 계속되면 앞으로 3년 안에 모든 농사를 접을수 밖에 없다 하셨다. 평생 농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우리 앞에 놓인 기후 위기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젠 주위에 농사를 짓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것도 함께 걱정했다. 농촌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과 현재의 농부들이 대부분 이미 고령화로 들어섰기 때문에 여기저기 휴경지가 많다고 하였다. 당신도 여기저기 고장난 몸이라 할 수만 있다면 멈추고 싶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을 어찌 놀릴 수 있느냐며 지금까지 끌고 왔다고 하셨다.
요즘 평생 농사를 지으신 농부님들을 만나면 먼저 묻는 것이 있다. 이번에 복숭아는 어떠셨어요? 이번에 벼는 어떠셨어요? 가을 배추는 잘 자라고 있나요? 등 모두 농사와 관련된 물음이다. 그러면 대답이 거의 같다. 어제 쌀 도정을 하러 정미소에 가서도 많은 양의 논농사를 지으시는 분에게 여쭸더니 작년보다 2자루 정도 적은 소출이었다고 한다. 작년의 경우 한 마지기에서 16자루를 얻었는데 이번엔 14자루였단다. 2자루면 쌀 한 가마니란다. 나처럼 몇 마지기 하는 농부도 소출이 작년보다 적다고 감지하는데, 논농사를 주업으로 수십 마지기 하는 농부로서는 무시하지 못할 양이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수확의 기쁨도 크지만 한해 한해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기후에 대해 근심의 눈길을 건네기도 한다.
작년보다 가을 단풍이 진하다. 마을 어귀의 은행은 예쁜 노랑을 뽐내고 있다. 산 중턱에는 몇 년 전 새로 심은 나무가 제법 자라서 가을색을 드러내고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슷한 색상끼리 모여있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각양각색의 물든 잎들이 조화를 이루며 이 가을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콩은 잎이 다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주중에 된서리가 내리면 그 서리를 맞은 콩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쌓이면서 한 해의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러면 올해의 농사도 마무리 짓는다. 그렇게 11월은 가을의 깊은 뒤안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