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실패담
오랜만에 전화 연락이 닿은 같은 선배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용무는 따로 있었지만 간단히 전달 하신 후에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 목회를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지만, 지난 번 어느 신문 기사에서 보고 교회 개척해서 한곳에서 머물면서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노라고 말씀하셨다. 기실 알고 보면 개척이 아닌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의 두 번째 담임자이고, 딱히 드러낼 것 없는 모습에 나는 기도 요청을 했다. '명실상부해야함이 좋겠지만 기사와 현실은 판이할 수 있으므로 그냥 기도해주실 것'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드문드문 들었던 그 선배 목사님의 소식에 귀가 띄었던 때를 떠올렸다. 나는 그 목사님의 젊은 시절 목회가 나와 많이 닮아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내게 꼭 해주시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해달라고 먼저 요청했다. 처음에는 아니라 거절하셨다. '나는 실패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목회가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 나눌수 있다면 기준이 무엇인가? 생각해볼 여지가 많지만 재차 요구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 실패했다고 생각하신다면 누군가의 실수와 실패가 도리어 뒤에 오는 사람들을 비추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느냐'며 지혜를 구했다. 어쩌면 나도 그 말을 듣기에 이미 늦은 사람일수도 있다. 잠깐 정적이 있은 다음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씀하셨다. 선배 목사님은 나를 응원해주시면서 자신의 실패를 돌이켜 볼 때 후회하는 것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건물에 모든 것을 걸지 말 것. 무리하게 빚을 져가면서 교회 건물을 매입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하셨다. 빨리 안정을 이루고 이내 성장해야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상가, 임대한 건물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목회를 잘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러한 조언이 처음은 아니다. 지척에서 목회하시던 은퇴하신 이웃교단 목사님의 조언을 생각나게 했다. 교회에서 예배당과 부속 시설은 ‘반드시 건축이 먼저’가 아니라 ‘교인들을 위한 공간이 우선’이어야한다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다만 목사가 힘쓸 부분은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린 건물이라 해도 내 건물처럼 귀하게 여기고, 교인들과 함께 청소하고, 관리하고, 다듬어서 예배드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만들라는 말씀이다. '목회는 생명을 대하는 일이고 살아있는 생명체가 소중한 것'이기에 건물에 투자하기 보다는 그럴 능력과 수고를 사람들에게 쏟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
둘째, 현재 목회에 최선을 다할 것.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항상 준비되어야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신다. '나는 여기서 뼈를 묻겠다'는 호언장담은 결코 지혜롭지 못한 단언이다. 가라하시면 가야하는 것이 또 목사라고 하셨다. 노마드 크리스천, 플로팅 크리스천 같은 말에 목사도 예외 아닌가보다. 오해가 없어야 되는데 자기 욕심 따라 더 큰 규모의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것을 분별하는 기준 또한 제각각인지라 모호했다. 두 번째 조언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자신은 약방의 감초라 할 만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인맥을 따라 쫓아다녔었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돌연 잠깐 전할 이야기가 있어 전화했는데 너무 말이 많았다면 미안하다며 목사님은 전화를 끊으셨다. 꼭 한 번 만나서 식사 대접을 하면서 뵐 수 있기를 바라며, 그때 더 조언해 주실 것을 제안 했다. 전화를 끊고 보니 통화 시간이 30분이 훌쩍 넘었다.
성공 목회의 신기루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패배주의는 때로 힘겨운 상황들을 연출하기도 한다. 가정의 불화, 생활고, 지속적 불안과 심리적 파산, 열등의식, 우울, 도피, 잠행, 대인기피로 드러난다. 중년으로 접어드는 목회자들이 ‘나는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을 벗어던지기 어렵다. 나 역시 그런 감정과 고통 속에 오랫동안 나 자신을 애써 외면하거나 방치할 때가 많았다. 그런 고통이 나를 집요하게 괴롭힐 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멈춰 서서 말씀을 붙잡을 수 있다면 은총이다. 수렁에 빠져있을 때 호통과 각성하는 말로 나를 일깨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돌보심'이다.
왜 최후 승리가 중요한가? 즐거웠던 연휴의 마지막을 망치는 것도, 데이트의 끝이 좋지 못해 하루 종일 기쁨이 일순간 사라지는 것도, 다 잡은 경기를 놓치는 것도, 평생 달려온 길이 불명예스러운 퇴진으로 허망하게 끝나는 것도, 마무리가 좋지 못해 호평이 악평으로 바뀌는 것도 결국 승리, 종당에 승리, 최후 승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와 싸움에서 이미 승리했고 이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남겨진 삶의 순간 동안 최종적이며 완전한 최후 승리를 위해 가야할 길이 정해져 있는 우리가 아닌가? 멈춰서서 패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만든 것만으로도 되새겨 볼 대화였다.
신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