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채비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째가 되어 간다. 옛집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이 남아있다. 마음을 모으고 힘을 좀 쓴다면 하루 만에 해치울 수 있을 양인데 이런저런 핑계로 여태 미루고 있는 상태다. 만약 옛집에 누군가 들어온다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느슨하게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짐들 만큼이나 내 마음도 어수선하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이전만큼 애써 하려고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추위가 곧 다가올테니 그 전에 서둘러 옮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주 전 반짝 추위가 찾아왔다가, 이번주에 다시 추위가 찾아들었다. 옛집만큼이나 새로운 집도 허술하긴 마찬가지인지라 집 안 공기가 찼다. 올 겨울을 이사한 곳에서 맞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들어가기 전에 손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추위가 찾아든다 할 때 황소바람이 드는 곳들을 찾아 문풍지와 방풍비닐과 커튼으로 단단히 겨울 채비를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그런 노고로 갈수록 집 안이 훈훈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보일러가 잠시 가동을 하면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제 10월 말 정도 되면 정식으로 연탄보일러도 피우게 될 것이니 이만하면 견딜만한 겨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주일 겨울 채비를 하면서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름보일러 기름통의 눈금호수가 베어져 등유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전기 테이프와 실리콘으로 임시변통을 해보려 하였는데, 눈금호수를 잘못 건드려 아예 똑 부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등유가 솟구치면서 바닥이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통 안의 등유가 모두 쏟아질 판이었다. 가뜩이나 요즘은 등유값도 하늘로 치솟고 있는데 멍하니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순간 뇌가 풀가동되면서 위기 탈출 행동이 저절로 나타났다. 기름통은 직사각형의 200리터짜리인데 통 안의 기름은 100리터 정도 있었다. 세로로 세워진 통을 가로로 눕히면 새는 기름을 막을 수 있을법 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하여 통을 옆으로 뉘었다. 그리곤 철물점에 가서 부속품을 사다가 새로 교환을 했다. 괜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냐? 이제 통을 다시 원상태로 세워놓아야 하지 않은가. 엎어트리고 자빠트리는 것은 쉬운데, 그것을 다시 세워놓는다는 것은 갑절의 힘이 필요했다. 아, 이럴 때 함께 힘을 쓸 사람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애석했다.
사실 그랬다. 이번에 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전화 한 통화로 도움을 요청할 친구 특히나 남친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에구, 인생 참 재미없게 살았구나.“라며 혼자 우스갯소리를 하며 웃었다. 그러니 함께 하면 금방일 것을 몇 배의 힘을 쓰면서 기름통을 일으켜 세웠다. 내 몸에 백만 스물 둘의 에너자이져 건전지를 장착해 놓았던 것이 틀림없다. 내 청년 시절의 별명이 힘녀였는데 그 힘이 위기의 순간에 삼손처럼 발휘가 된 것이다. 등유 기름통 뿐 아니라 5단 책장이며 무거운 책상도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옮겼다.
요즘은 습기 제거를 위해 지붕 물받이와 바깥 벽면에 시멘트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재주는 완벽하지 못하지만 이 겨울 추위와 냉기로부터 영향을 덜 받으려고 몸부림치는 중이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만지다보니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식으로 실력도 조금씩 나아지기도 한다. 그리고 요즘 시대엔 유튜브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원하는 작업을 검색하여 두어 개 정도 시청하면 웬만한 것은 거의 할 수 있게 된다. 그 덕분에 나같은 아마추어도 뚝딱거리며 겨울 채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사 못지않게 나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이 농사다. 이번 해의 농사는 건진 것이 거의 없으니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들깨를 심은 밭은 눈에서 멀어진 곳에 있어서인지 마음에서도 멀어진 상태고, 콩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또한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속수무책으로 내린 장마로 거의 들여다보지 않아 풀도 무성하다. 수확하기 전 풀만이라도 정리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마음에 크게 내켜지지 않으니 걱정이다. 그러면서도 내년 농사를 준비하려고 하니 참 대책없는 농부다. 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고 막판 뒤집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주가 관건이다. 참, 이번주 토요일에 벼수확을 한단다. 새일미라는 새로운 벼종자를 심었는데 밥맛이 어떠할지 조금은 기대된다.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