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쁘다 이 말이여!
요즘 사람들의 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오히려 남의 말을 색안경을 끼고 듣는 풍토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말의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말을 둘러싼 힘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말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면 분위기는 여론을 압도할 것이고, 설득된 다수를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매번 진영논리는 전염병처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중이다. ‘말의 시비’는 일상화되고, ‘말의 인기’는 늘 ‘좋아요’를 구걸하듯 한다. 대통령의 말조차 민간의 검증과 언론의 팩트 체크라는 심판대 위에 놓였다. ‘말의 처지’에서 본다면 말의 엄중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말의 광장이든, 언어의 시장이든, 여론의 전쟁터가 됐든 말은 항상 다투게 마련이다. 그 결과는 진실과 인기와 권력이다.
그런 점에서 말의 장터에서 이미 퇴물 취급을 받는 교회의 언어가 과연 세상을 바꾸는 말의 힘을 지닌 수 있을까? 오래도록 세상의 멘토를 자처해 온 교회의 말이 더 이상 세상에서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거창한 이슈를 다룬다고 말의 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정갈한 말 한 모금인데, 여전히 스스로도 버거운 말의 홍수를 쏟아낸다. 교회의 구호와 슬로건, 캠페인을 살펴보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의 성찬으로 가득하다.
교회의 말 습관은 언어의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을 번번이 겪으면서도 입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교리적인 말,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 통하는 끼리끼리 말, 현실인식을 상실한 겉치레 말, 과도한 친절로 치장한 느끼한 말의 위선 때문이다. 오죽하면 ‘설교하다’ 속에 담긴 말의 의미가 ‘진부한 잔소리를 늘어놓다’와 같은 뜻이 되고 말았을까.
아직도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한 말씀’해야 한다는 말의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목소리에 과도하게 힘을 주거나, 앰프를 키워야 한다는 강박함을 느끼고 있다. 말하기에 앞서 귀담아들어야 함에도, 말의 남대문시장처럼 교회의 언어는 번잡스럽기만 하다. 탈무드는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 주워 담기 힘들다”며 말을 엄중히 경계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을 배웠다면, 입을 열기에 앞서 우선 ‘들을 귀’를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처음 한국교회는 말을 주도하였다. 한글성경은 한글과 우리말의 물꼬를 텄고, 3.1독립선언문에는 그리스도교적 말의 표현과 생기로 가득하였다. 그때는 교회가 말의 역사를 만들고, 역사적 말을 생산하였다. 성령은 말을 소통시킨 하나님의 사건인데, 일제강점기 당시 바벨의 혼란을 극복하고, 공감을 불러왔던 것이다.
2006년 여름, 서울에서 세계감리교대회(WMC)가 열렸다. 대회 중 임진각 잔디밭에서 외국인참가자들과 함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주일예배를 드렸다. 설교자 선데이 음방 감독은 휴전선을 바라보며 한국 사회의 갈등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많은데 왜 이 사회는 분노로 가득합니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우리 시대와 화해할 그리스도인의 말은 무엇일까 두고두고 생각하였다.
과연 우리 시대의 잠언(箴言)은 무엇일까? 아픈 부위에 혈을 통하게 하는 침과 뜸(鍼灸)처럼 무딘 우리 마음에 영적 순환을 순조롭게 하는 콕 찌르는 말씀을 벼른다.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말 한마디의 존재가 가능할까? 존 번연은 “기도할 때에 마음에 없는 말로 하지 말고 말 없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말을 기대하기에 앞서 지금 필요한 것은 ‘침묵의 언어’이다.
예수님은 목에 힘주는 성명(聲明)서의 언어가 아닌, 비유와 그림을 통해 소박하고 일상적인 ‘상징의 언어’를 즐겨 사용하셨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의 언어는 독선 안에 갇혀있다. 침묵과 상징이 사라진 지금, 우리가 사용해온 개념화된 문자언어는 유통기한이 이미 지나버렸다. 말은 하되 주장에 그친 채, 행함이 없었던 까닭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딤후 2:11). 말에 대한 믿음과 신실함이 사라진 오늘, 말의 위선과 말의 유희만이 가득하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