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으로 맛보는 교회의 연합
해마다 10월 첫째 주일은 세계성찬주일로 지킨다. 1936년 미국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 한 형제자매임을 기억하고 고백한다.
영국의 시인이며 찬송작가 존 옥센햄(1852- 1941)은 멋진 성찬식 초대문을 작성하였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 모두를 부르셔서 빵과 포도주를 주시고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경건한 사람인지 죄인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와 자유인을 동일하게 상속자로 받아들이십니다.”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예식은 가장 오래된 애찬 의식이다. 광야의 성찬이라 불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성찬식에서 빵을 나누는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막 6:41).
예수님이 떡을 ‘손에 드시고’(take),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thanks) 다음, ‘떡을 떼어’(break), ‘나누어 주라’(give)고 하신 성만찬의 4가지 단어가 모두 담겨있다(막 14:22).
여기에서 빵은 성가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의 첫 소절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처럼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가난한 음식이며, 영혼의 양식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모든 음료의 대명사이다. ‘젖과 꿀, 포도주’는 목마름을 해갈하고 풍요로운 삶을 자부하는 상징들이다. 노아가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포도 농사는 전통적으로 축복의 수확물이었다. 야곱은 복의 계승자 유다에게 이렇게 축원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창 49:12).
포도주는 농업의 자부심이다. 독일 모젤강변의 포도밭은 독일 농부들이 얼마나 부지런한가를 보여준다. 햇빛이 귀한 나라에서 강물에 반사되는 빛까지 담아내려고 경사진 곳에 가지런히 가꾼 포도밭의 가르마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샌프란시스코 북쪽 태평양 연안의 나파밸리의 와이너리(Napa Winery)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포도주의 자존심이다. 이곳 포도주 맛은 뜨거운 태양과 해풍으로 길들여졌다. 귀족의 콧대를 높여준 프랑스 포도주나, 가장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조지아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우리 교회 성찬용 포도주는 특별하다. 포도주를 빚는 곳은 보은군 속리산 곁 ‘다정마루’이다. 도시에서 살다가 농부로 전향한 내외 집사님은 해마다 포도주를 빚어 이듬해 쓸 포도주를 맑게 걸러 성탄절에 교회로 가져온다. 두 분이 평생 자임한 사역이다. 성찬용 포도주는 그해 수확한 포도로 빚은 새것이지만, 10년 이상 나누었던 포도주의 역사가 모두 담겨있다. 비결이 있다. 해마다 씨간장을 보존하듯, 이전 포도주를 남겨 두었다가 새 포도주와 섞는 것이다. 2010년 원년의 묵은 포도주는 해마다 새 포도주와 함께 발효한다. 그렇게 역사적 포도주로 주님을 성찬을 기념하는 기쁨이 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사도교회에서 배운 방식이다.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성유(Holy Mile)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40여 가지 꽃을 모아 7년 동안 묵혀 만든다. 이 기름은 성별과 축성 후 온 교회로 분배되는데 이전에 보관한 성유와 반반씩 섞어 종유식에 사용한다. 성유는 아르메니아사도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의 일체감은 물론 초대 교회와 역사적으로 일치를 유지하려는 마음을 담았다. 게다가 자기 민족의 산야에서 사랑받는 꽃과 풀들로 짠 기름은 복되고 거룩하다.
색동교회가 새로운 절기가 시작하는 일곱 주일에 성찬식을 하는 뜻도 같다. 하나님의 달력을 기억하고, 그 은총의 시간 안에 살려는 이유이다. 사실 모든 성찬용 빵과 포도주는 가장 고귀한 DNA를 품고 있다. 주님의 상한 몸과 보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장 평범한 음료조차 주님의 몫으로 구별되는 순간, 거룩해진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안에 머물 때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법이다.
“이 빵을 나눌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합니다. 이 잔을 나눌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과 한 잔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분병례 예식문).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