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희망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최근 예민한 사회적 이슈들에서 개신교가 보여주고 있는 친권력성향의 정치적 행태를 비판하던 한 칼럼니스트는 주기도문의 시작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저 문체는 20세기 초반에 한반도에서 사용되던 문체이다. 그러면 왜 저 오래되고 딱딱한 문체를 바꾸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이 종교 권력의 핵심이다.”
언젠가 한 기독교대학에서 교목으로 일하시는 목사님께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얼마나 일반 대중에게 이질적인지 자신의 일화를 통해 얘기해주신 적이 있었다. 그 목사님은 신앙이 없는 조교에게 기독동아리 리더들 모임의 회의록을 작성하도록 시키셨다는 것이다. 모임에 참석한 후 돌아온 조교는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도저히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놀랍게도 조교가 못 알아들은 것은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대화에서 사용된 ‘용어’들이었다.
예를 들어 ‘소망’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교회이름으로도 자주 선택될 만큼 좋아하는, 교회에서 즐겨 사용되는 용어다. 그러나 일상에서 ‘소망’이라는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소망’의 자리에 사용하는 단어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말을 대할 때 느끼는 이질감은 아마도 우리가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말을 대할 때 느끼는 이질감과 같을 것이다. 왠지 희망보다는 더 깊은 뜻을 담은 것처럼 여겨지는 ‘소망’도, 일상에서 사용되는 ‘희망’도 영어로 번역하자면 똑같이 ‘hope’일 뿐이다. 어디 소망뿐일까, 고어(古語)의 성경어투를 그대로 교회의 일상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점점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성경의 말투는 왜 이렇게 근세의 말투를 벗어나지 못할까?
교회는 여전히 다소 고친 근세어투의 성경을 사용한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도 쓰이긴 하나 여전히 참고의 목적일 뿐 교회의 성경, 예배의 성경은 여전히 20세기 초반의 언어다. 이 언어의 문제, 복음 자체가 지니는 이질감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이질감의 문제는 이미 교회 안에서도 여러 차례 제기되곤 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언제나 선교적 측면, 즉 이 근대적 어투가 선교에 장애가 된다는 측면에서만 다루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저 칼럼니스트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문제의 다른 측면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바로 권력,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 권력이었다. 많은 경우에서 그러하듯 언어는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도구로도 기능한다. 가정이든, 학교든, 교회든, 한 쪽은 반말을 쓰고 한 쪽은 존댓말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대체 어떤 종류의 평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현대어 번역의 성경은 성경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이것이 교회가 고어를 유지하는 주요한 이유라면 저 칼럼니스트의 지적을 단호하게 틀렸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때로는 밖으로부터의 시선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기도 하니까.
종교개혁은 루터의 성경 번역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는 사제들만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일반 대중에게 돌려주었다. 성경을 둘러싼 언어 권력을 해체하고 백성들에게 성경을 돌려준 준 언어의 현재화, 종교개혁은 바로 이 성경 언어의 현재화 사건이었다. 교회의 말은 좀 더 지금의 세상과 같아질 필요가 있다. 성경이, 교회의 말이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한국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으면 좋겠다. 상대와 같아짐은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니까.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 1:14)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