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들의 공동체
얼마 전 문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톨스토이의 언덕을 넘으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큰 산이 다가온다.” 이 말은 러시아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거장들이다. 톨스토이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인간 내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도덕성을 강조한 사상가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심연의 어두운 부분을 매우 적나라하게 잘 파헤침으로써 은폐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폭로시킨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인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첫 페이지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말하자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설의 주인공인 카라마조프가의 막내아들 알료샤는 수도사로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을 지도한 수도원의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해 수도 생활의 참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도 생활은 마치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과 단절된 채 수도원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수도 생활은 무의미한 고립적 삶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삶 곧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삶이다. 그 좋은 예가 소설 속에서 진정한 수도자의 모범으로 등장한 조시마 장로의 모습이다. 그런데 수도자였다가 “속세에 머물라.”는 스승 조시마 장로의 권고에 의해 수도사를 그만두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일종의 재가 수도자가 된 소설 속 주인공 알료사의 삶 또한 그렇다. 이처럼 수도원 안에서 수도하든 아니면 수도원 밖에서 재가 수도자로 생활하든 중요한 것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 힘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권에 보면, “양파 한 뿌리”에 대한 우화가 나온다. 그 이야기 역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톨의 밀알 비유와 비슷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옛날에 참 못되고 못된 한 노파가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었다. 죽고 나서 보니 노파는 그동안 착한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악마들이 그녀를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노파의 수호천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녀를 변호할까 고민하던 중 다행히 양파 한 뿌리를 기억해 낸다. 노파는 과거 어느 날 딱 한 번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수호천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에게, “양파를 갖고 노파에게 가서 그가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양파를 갖고 지옥에 가서 그것을 노파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노파는 그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옥의 다른 사람들이 그 양파를 같이 잡고 오르려고 발버둥을 쳤다. 노파는 그 양파가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밀치자, 양파는 그만 끊어져버리게 되었다. 결국 노파는 끊어진 양파와 함께 영원한 불바다 속으로 떨어졌고, 수호천사는 슬피 울면서 그의 곁을 떠났다는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양파 한 뿌리 같은 아주 작은 선행이라도 인간을 지옥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말하자면, 양파 한 뿌리는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알에 비견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선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주일학교에서 종종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믿음으로 가는 나라>라는 곡이 있다. 가사 중에, “어여뻐도 못 가요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가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야 간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과연 맘 착해도 가지 못하는 나라라는 말은 맞는 말일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마 25:31-46) 거기에 보면, 양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 한 모금 건네주는 것과 같은 아주 작은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롬 2:14-15) 말하자면, 그들은 양파 한 뿌리 같은 선행을 실천한 사람들이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선행의 삶을 산 자들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 많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좋은 핑계거리가 되는 우리의 작은 선행을 찾고 계신 것은 아닐까?
믿음과 선행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선행이나 양파 한 뿌리 같은 착한 일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수도원에서 고독을 씹으며 인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수도사의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비록 작은 일일지언정 자신도 살리고 또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속담에 ‘일일일선’(一日一善)이란 말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같이 매일매일 착한 일을 도모함으로써 선행으로 우리의 존재양식을 삼는 그런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꿈꿀 수는 없을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너무나 약삭빠르고 또 이기적이라는 비난이 익숙한 이 시대에, 그런 꿈은 헛되고 잘못된 꿈일까?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톨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기꺼이 죽는 공동체요, 또 양파 한 뿌리 같은 작은 선행일지언정 묵묵히 그것을 실천하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손원영 (서울기독대학교 교수)
* 이글은 손원영 저 <내가 꿈꾸는 교회>(모시는사람들, 2021)에 실린 글을 수정하여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