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십니까?
시간이든, 사건이든 뚜렷한 분기점이나 충격을 맞을 때면 누구나 특별한 결심을 한다. 변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다짐이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것을 갑작스레 바꾸려고 하다보면 하나도 실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 말도 있다. 물론 어영부영 결심조차 소홀히 한다면 과거는 다시 우리를 지배하려 들 것이다.
다짐은 항상 희망적이다. 결심과 의지를 통해 변화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적거리며, 달라지기 어려운 환경요인은 두려움으로 남는다. 그 결과 감정의 표면과 이면에는 늘 ‘희망’과 ‘불안’이 끝없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대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의 원인은 자신의 존재기반을 불안정하게 흔드는 실체 때문이다. 작년 연말부터 전염병처럼 돌고 도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물음은 그런 안녕치 못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러한 불신과 불안에 대한 이의제기는 큰 공감을 얻었다. 거리와 광장에서 촛불의 규모도 점점 키워왔다. 이는 개인이 겪는 잠재적 위기의식이 사회화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불안과 불신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증상은 누구나 생채기 난 내면을 호소하지만, 집단적으로 나타날 때는 이미 사회적으로 축적된 트라우마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통해 온 국민은 집단적 분노에 대해 공동학습 중이다.
지금 국민증상이 된 분노는 분명한 방향이 있다. 분노,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은 누구나 알며 인정한다. 그런 까닭에 분노를 억압하거나, 애써 회피한다면 점점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 분노가 외적 표현이라면 우울함은 내면화된 모습이다. 웃음을 잃은 사회는 심각한 우울증세를 보인다. 안셀름 그륀의 말처럼 “우울증은 온 세계 각 나라의 국민병이 되었다”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그 처방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현대사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학습한 바 있다.
사람의 감정은 짧은 순간에도 열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철학자 강신주는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를 바르게 진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자기감정에 포스트 잇(Post It)을 붙여주자”고 제안한다. 자신의 불안한 내면 상태도 자인해야 치유가 가능하듯, 외적 문제 역시 그런 담금질을 통해 조금씩 극복해 나갈 수 있다. 때론 촛불도, 함성도, 국화도, 장미도 모두 필요한 치유법이다.
물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감정의 포로가 되기보다, 영적 생활을 통해 위로와 치유를 얻기를 원한다. 얼마 전에 읽은 헤른후터 공동체의 묵상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죄는 항상 우리 마음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사랑은 열린 팔로 늘 우리를 안아 줍니다”(요한 안드레아스 로테). 영적 생활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행동을 가능케 한다. 기도는 정지된 마음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께 말함으로써, 관계 안에 참여하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하다. 누구나 존귀한 이유는 저마다 고유한 사연과 감정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가 소중하듯, 남의 감정은 얼마다 특별한가? 무엇보다 이야기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과 친구,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들어줄 상대자가 있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감추고 억누르는 것보다 먼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감정의 제왕은 ‘사랑’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출발점이고, 귀착점이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사랑은 그가 하나님과 든든히 연결된 존재임을 증명하는 최고의 표현방식이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송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