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몬트리올 예수》 (Jésus de Montréal, 1989)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예수님이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세상에 오셨더라면 어땠을까? 공교롭게도 이 질문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유다가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뮤지컬 속의 유다는 예수님께 왜 하필이면 2,000년 전 유대 땅에 오셨느냐고 묻는다. 요즘 같은 인터넷시대에 유튜버들이 지천에 깔린 환경이라면 예수님은 대중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단번에 효과적으로 전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대중들은 또 얼마나 열광했을 것인가? 뮤지컬 속 유다는 예수님 앞에서 바로 이런 식의 자기주장을 펼친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정말 그럴까? 만일 지금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복음은 2,000년 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예수의 제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시대를 잠시만 들여다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지금이라면 과연 크게 달랐을까?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그분을 뜨겁게 맞이했을까? 사정이 그렇게 만만하고 쉬울 리는 없다.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사람들과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그분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한 분으로 다가오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파는 여인들, 건달들, 부랑자들과 같은 혐오 받는 소수자들과 어울려 다니시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는 그 분의 모습이 우린들 편할까? 저마다의 위선쯤 하나씩 안고 적당한 타락 속에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알몸으로 서라는 말씀을 과연 따를 수 있을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한들, 이미 내 손 안에 가득 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빈 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닐까? 지금 예수님을 맞닥뜨린다 해도 어쩌면 우리는 저 옛날의 부자청년처럼 축 처진 어깨로 예수님께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영화감독 드니 아르깡의 《몬트리올 예수》는 바로 이러한 불편한 상상을 전해주는 이야기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재능 있는 연극배우 다니엘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옥외 연극을 교회로부터 위탁받는다. 예수님에 대한 당시의 급진적인 이론을 포함하여 그가 마음대로 수정한 대본을 교회가 달가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그가 모은 단원들과 함께 연극을 강행한다. 다니엘이 주도한 연극은 대중과 당시 문화계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여러 갈등 끝에 비참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연극 속에서 예수를 연기하는 다니엘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상업주의자들, 공권력과 충돌해가며 점점 더 예수를 닮아간다. 그렇게 예수를 닮아갈수록 다니엘은 세상으로부터 점점 더 낯설어지고, 마침내 현대의 몬트리올 예수는 저 옛날 나사렛 예수께서 당하셨던 운명을 자연스레 함께 나누어 지게 된다.
영화는 연극과 현실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영화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겪었을 일들을 현실에 투영시킨다. 그렇게 영화는 만일 예수님이 오늘 이 시간에 세상에 오셨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게 한다. 1989년도라는 오래된 표피를 가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간직한 메시지의 힘과 울림은 결코 낡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영화의 거의 끝부분,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갔으나 변변한 치료도 못 받고 병원에서 나온 다니엘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예수의 소리로 마지막 일성을 발하는 장면-그 내용은 주님께서 주셨던 종말과 거짓 메시아에 대한 경고였다-은 언제 보아도 깊은 인상을 준다. 이 지하철 장면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현대적 은유로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가슴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