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는 건너가는 듯한데…
위협적인 태풍은 안타깝게도 아래 지방을 훑고 지나가며 큰 피해를 입혔다. 추석이 코앞인데 예상치 않은 수해의 아픔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보낸다.
이곳 음성도 태풍의 영향으로 이틀 동안 많은 비가 내렸다. 재작년 내린 폭우로 무너졌던 밭기슭이 올해는 괜찮은지 석달 내내 마음을 졸이며 보냈다. 그렇잖아도 태풍의 강도가 크다 하여 이틀 동안 계속 내리는 비속에 두어 번 정도 그곳을 살펴보았다. 다행이 지난번 무너진 곳은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아 흙이 쏟아지는 것은 면했다. 그런데 다른 한쪽, 배수구가 있는 곳은 토사가 밀려 내려와 도로와 거의 맞닿아 있었다. 지속적으로 내린 비 때문에 땅이 부슬부슬해지면서 결국 엊그제 비가 마지노선이지 않았나 싶다. 위태롭게 걸려 있는 흙을 보면서 저곳에도 모래주머니를 쌓아 보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남긴 흔적은 크다. 재라도 남기는 불도 무섭지만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도 만만치 않은 무서운 재해다. 봄철에는 가뭄으로 큰 불이, 여름철엔 강하고 굵은 비가 잦아지고 있다. 모든 것이 우리 삶의 욕망과 욕심이 넘쳐나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삶 전반을 절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큰 재해가 우리에게 돌아올지 모른다. 나도 만약 계속 도시에서 살았더라면 잘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아니, 무심하고 무관심하게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은 인간에게 보여주는 지구의 경고를 시골살이로, 기후로, 농사를 통해 보고 듣고 겪으며 아픈 지구를 위해 기도하게 한다는 것이다.
점점 밭으로 가는 나의 발길은 뜸해진다. 그 어느 해보다 더 돌아보지 않는다. 지난주일 교회에서 만난 권사님은 작년보다 서너 배 정도 늘려 콩을 심었는데 웬걸? 잦은 비가 콩의 수확을 막고 있는 셈이다. 적당한 비는 토양과 작물에 유리하지만 넘치는 비는 토양과 작물에게 모두 어려움을 선사한다. 권사님은 콩이 죄다 쭉정이만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셨다. 그리고 망(?)한 콩을 정리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란다. 몸도 성치 않은데 질긴 콩대를 뽑고 비닐을 거둘 생각을 하니 나아지는 몸이 다시 병들 것 같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어떤가? 나도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지난 몇 주 동안 콩밭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무성히 자란 콩 사이로 풀은 어찌나 많이 올라왔는지, 내가 언제 풀을 베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사이로 무럭무럭 자라고 뚱뚱해진 토끼는 여전히 나의 속도 모르고 콩을 갉아먹고 있다. 이젠 내가 가까이가도 도망치지 않는다. 저번에는 너무 기가차서 화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토끼에게 하소연을 했다.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꼴이 더 얄미워서 돌을 들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몸을 돌려 풀숲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도망가는 뒷모습을 향해 “내가 올해는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내년에는 어림없다”고 호통을 쳤다. 녀석도 살고자 하는 생명인데 차마 잡지 못하고 그렇게 방치하다 살찐 토끼로 만들었으니, 올 추석엔 달나라에 가서 방아를 찧을 수 있겠나?
8월 중순 경에 마을 반장님이 주신 서른 포기의 배추를 심었다. 김장 배추이지만 김장을 하려고 심기보다는 겨우내 배춧국 재료로 쓰려고 심은 것이다. 작년에는 저장법을 몰라 거둔 배추를 하우스 한 귀퉁이에 놓고 천막을 덮어놓았는데, 나중에 보니 모두 썩어서 먹지도 못하고 밭의 거름이 되었다. 올해는 뽑지 않고 밭에 방치하려고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첫 장면에 주인공이 겨울 한밤중에 고향집에 내려와 먹는 국이 배춧국이었다. 밭에서 눈과 찬바람을 맞으며 긴 겨울을 버티는 배추가 꿀맛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은 뒤늦게 겨울 배추 저장법을 기억나게 했다. 굳이 뽑아놓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괜한 일을 하여 아까운 배추만 버린 셈이다. 올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해보리라. 진짜 꿀맛인지는 한겨울의 후기로 남겨놓으리라. 배추는 벌레가 많이 생기는 작물이다. 만약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핀센으로 배추벌레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을텐데 비가 많이 와서 벌레도 맥을 못추는지 깨끗하다. 배추벌레를 잡아 닭에게 던져주면 엄청 잘 먹는다. 초반엔 배추색과 동일한 벌레를 보고 기겁을 했다. 이 벌레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고심을 했지만 약을 치지 않을 것이면 별 수 없다. 손으로 잡을 수밖에. 그 느낌 아는가?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잡힌 벌레는 꿈툴꿈틀, 말랑말랑하다. 잘못 집으면 터질 수 있다. 조심스럽게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스믈스믈 기어다니며 도망갈 궁리를 한다. 으아! 징그러움이 폭발하는 순간이지만 그것도 자꾸 보고 만지다보니 나중에는 얽히고설킨 거의 스무 마리 이상의 벌레를 움켜잡아 닭에게 던져주는 넉살이 생겼다. 지금은 보는 즉시 잡아서 맞은편 풀숲으로 던진다. 이것도 살고자 하는 생명인지라 닭에게는 줄지언정 내 손으론 차마 직접 죽이지 못하겠더라.
오래간만에 맑은 하늘을 맞는다. 내 마음도 맑아진다. 이제는 낮에 부는 바람의 기운도 서늘하다. 짧은 옷을 보내고 긴 옷을 들여야겠다. 눈 깜짝할 사이 맞이한 가을의 입김을 다가오는 추석과 함께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 둥근달을 보며 어떤 소원을 빌 것인지 마음의 준비도 해야겠다. 모두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시길 빌며!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