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십자가
‘북극곰을 지켜주세요’로 유명한 세계자연기금(WWF)은 자연 보전을 위해 설립된 국제 비정부 기구이다. 늘 극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그린 피스(Green Peace)나, UN 산하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도 있다. 국제 그린크로스(International Green Cross)는 민간 차원의 환경보호운동기구이다. 환경운동연합이나,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우리나라에서 친숙한 단체이다. 모두 지구의 벗들이다.
‘지속가능한 지구’는 환경운동을 표방한 모든 기구와 단체들의 공동목표다. 그들은 지구가 대체할 것 없는 단 하나뿐임을 잘 알고 있다. 인류가 계속 존재하려면 지금까지 인간 편의와 이익만을 추구하던 발전 위주의 가치관을 바꾸고, 자연과 공생하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당장 2016년에 체결한 파리기후변화협정(Paris Climate Agreement)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젠 모든 정치인이 환경을 우려하고, 기후위기에 대해 호소하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낯선 이야기였다. 그런 점에서 지난달 30일에 세상을 떠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예외적 인물이었다. 1991년 12월,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직을 내려놓은 그는 1993년 국제 그린크로스(초록 십자가)를 설립하였다. 이미 현직에 있을 때 UN에 제안한 것을 바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1985년 3월, 소련 중앙당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내내 세계뉴스의 중심인물이었다. 시계 제로의 앞날이 불투명한 소련이란 거함에 오른 선장 고르바초프는 비록 소련 체제를 유지하는 일에는 실패했으나, 전체주의 체제를 민주적 정상국가로 바꾸어 놓은 것은 분명하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냉전 해체이다. 이로 인해 동서 독일은 통일하였고, 동유럽은 공산주의 볼모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소련연방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들은 독립하였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 것도 그런 변화된 환경 덕분이다.
돌아보면 고르바초프는 기후위기 이전에 국제정치 환경의 탄소 제로 운동에 기여한 셈이다. 그가 추진한 개혁과 개방은 소련을 보다 인간적 얼굴로 바꾸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국민에게 자유와 자율을 부여하면, 이것이 창의성으로 나타나 경제회복과 민주주의의 성장으로 나아갈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가 구두선처럼 말하는 “보다 많은 민주주의와 보다 많은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고르바초프의 마지막 자서전 <선택>에 따르면 그는 농부의 아들인 것과 모스크바대학에 진학하기 전 집단농장에서 콤바인 운전자 경험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러시아 남부 스텝 지역인 스타브로폴은 그의 고향인데, 고르바초프는 대학 졸업 후 낙향하여 지역당 청년활동과 농업행정직으로 일하였다. 그의 출세의 계기도 지역 농업의 진흥을 위한 성실한 노력 덕분이다. 그가 중앙당으로 부름 받은 직책 역시 농업담당 서기였다.
합리적이고 민주적 태도를 지닌 신세대 공산당원인 젊은 고르바초프는 자기 고향과 농업에 대한 애정이 컸다. 당 서기장이 된 그의 목표 역시 국내적으로는 스탈린식 전체주의적 체제를 바꾸고, 국제적으로는 전략무기 감축과 군비경쟁을 없애는 것이었다. 소련 해체 후 탱크 공장에서 트랙터를, 미사일 발사대 공장에서 크레인을 만드는 러시아식 군수 전환 프로그램인 ‘콘페르치아’는 평화의 모델이 되었다.
당장 지구의 위기는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상태이다. 기후위기는 얼마나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인지, 마치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가 무겁게 의식하던 소련의 운명처럼 시계제로 상태와 다름없다. 고르바초프 스타일의 개혁과 개방 정책이 환경운동에도 필요하다. 한마디로 가치관 및 행동양식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것이다. 무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낸 후, 장차 더 큰 희생조차 의미 없는 일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혁신에 힘써야 한다.
고르바초프가 설립한 국제 그린크로스는 그 이름이 시사적이다. 대개 초록 십자가는 안전, 위로, 치유를 상징한다. 흰색 안전모에 그린 녹색십자가나, 병원과 약국의 십자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평소 적(赤)십자가 긴급한 위기에서 구원을 의미한다면, 이와 대비된 녹(綠)십자는 보다 장기적인 보건과 예방책을 뜻한다. 행여 그린크로스가 황급히 레드크로스로 바뀌지 않도록, 오늘 나부터 내 몫의 환경운동에 나서야 한다. 바로 그리스도인다운 창조질서 보전운동은 초록 십자가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