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가 장미꽃같이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에 우리 교회 할렐루야 성가대는 찬송가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를 특별 찬양으로 불렀습니다. 지휘자와 반주자 그리고 단 열 분의 성가대원들이 함께하셨음에도 예배당과 모든 이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감동의 찬양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어지간한 마음으로는 수요예배 성가대 운영이 쉽지 않을 텐데 맨 뒷줄을 든든하게 채워 주시고 계시는 네 분의 남자 장로님들을 비롯한 모든 성가대원들의 찬양은 저에게 늘 큰 감동을 전해 줍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예배와 찬양을 향한 그들의 열정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무엇보다 때에 따른 선곡이 좋았습니다. 감리회의 교회력에 따라 지난 주일을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로 지켰지만 민족 통일을 위한 간절한 마음과 정성을 담아 잘 쓰여진 공동기도문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외면당했고 대신, 분단 이후 70년이 훌쩍 넘도록 여전히 메마른 황무지와 같은 한반도 상황이 만들어 낸 민족정기의 깊은 신음소리만 들려 올 뿐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경색국면을 넘어 적대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를 생각하니 광복절을 전후하여 오히려 답답하고 절망스런 마음만 가득했었습니다.
그렇게 주일을 보내고 하루 이틀을 지내다가 수요 예배 때 들려온 그 찬송은 꿈과도 같았으며 광야에서 만난 시냇물과도 같은 노래였습니다. 말 그대로 ‘환상적인’ 노래였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와 아름다움과 평화 가득한 세상이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환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찬양은 무기력한 마음으로 현실에 굴복해 있던 저의 정신을 뻔쩍 들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꿈’은 하늘나라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재적 능력’이 되어 줍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맑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
눈물 나도록 아름답고 감격적인 장면들이 찬양 내내 펼쳐집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이사야 35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1절)’,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2절)’, ‘그 때에는...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6절)’,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8절)’,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9절)’,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10절)’
말씀만으로도 소망과 감격이 이토록 샘솟는데 여기에 덧붙여진 선율이 더욱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이 찬송가를 작사 작곡한 플로렌스 호턴(F. Horton)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찬송을 잘 들여다보면 제목과 가사와 선율에서 작곡가가 의도한 바는 명백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찬송가의 원제는 ‘Walking in the King's highway(왕의 대로를 걸을 때에)’입니다. 분명 이사야 35장 8절은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 곡의 제목과 모든 절과 후렴에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라는 표현이 쓰였습니다. ‘왕의 대로’는 원래 고대 근동지방에서 이집트와 예루살렘을 거쳐 다마스쿠스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의 통로를 의미하지만 이 찬송가에서는 왕의 왕 되신 예수께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를 때 왕의 행진을 맞이하듯 장엄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그 곳에 거하는 감격을 노래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빠른 박수를 내려놓고 우리에게 익숙한 템포를 조금 늦출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 곡에는 일종의 언어유희와도 같은 라임이 숨어 있습니다. 원곡의 후렴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re's a highway there and a way
Where sorrow shall flee away
And the light shines bright as the day,
Walking in the King's highway.
모든 소절의 마지막이 ‘~ay’로 끝나며 라임을 맞춥니다. 왕의 대로를 찬송하는 곡답게 라임을 맞춰 격조를 살린 것입니다. 그리도 또 하나의 언어유희의 라임이 있는데 후렴 첫 소절의 ‘a way’와 둘째 소절의 ‘away’입니다. 영어 발음은 동일하지만 첫째 소절은 ‘하나의 길’을 의미하고 둘째 소절은 슬픔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하지요. 비록 우리말 찬송가는 그 묘미를 살릴 수는 없지만 그 부분을 ‘검은 구름 없으니’로 번역해서 우리식의 표현을 살렸습니다. ‘암운이 드리워지다’라는 관용 표현을 사용한 매우 좋은 번역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을 우리말로 부를 때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이유로 인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검은 구름에 휩싸이곤 합니다. 바로 ‘검은 구름 없으니’의 리듬을 맞추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찬송을 부를 때 마다 이 부분에서 삐걱됩니다. 특히 마이크를 앞에 두고 이 찬송가를 인도해야 하는 사회자에게는 여간 짙은 암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멋진 곡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기피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나저나 이 찬송은 왜 이리 어색하게 작곡된 것일까요? 영어로 이 찬송을 불러보면 원곡에는 아무런 어색함이 없습니다. 다만 원곡의 음표들을 그대로 살린 상태에서 우리말 가사를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 가사에서는 사라졌지만 또 다른 ‘검은 구름’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덕분에 이 난코스만 지나게 되면 ‘낮과 같이 맑고 밝은’을 그 해방감에 더욱 맑고 밝게 부를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생기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영어 가사에서는 ‘Where’라는 관계 부사가 네 번째 마지막 약박에 쓰이고 다음 마디 첫 번째 강박에 ‘sorrow’라는 중요한 단어가 시작되면서 가사의 악센트와 음악적 악센트가 동일하게 어우러져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본질적으로 관계부사가 없고 악센트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 악보에 우리말 가사를 억지로 끼워 맞추게 될 때 어색해 지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말 찬송대로 부른 것을 시로 낭송하게 되면 ‘검! 은구름 어업 쓰니’라는 요상한 말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애국가의 첫 소절도 마치 못갖춘마디처럼 시작되어 매우 어색합니다. ‘동해’보다 ‘해물’이 더 강조됩니다. 서양음악의 틀에 우리나라 가사를 구겨 넣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몇몇 교회에서는 애초에 악보대로 부르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보니 의도치 않게 우리말의 의미에 맞춰서, 제가 제안 하고자 하는 대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검은 구름’의 ‘검’에 해당하는 음을 다음 마디 첫 박에 놓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면 우리말과 멜로디가 부드럽게 들어맞습니다. 박자를 틀릴 것만 같은 두려움도 없고 반대로 나는 박자를 잘 맞춘다는 자부심에 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는 일도 없으며 ‘왕의 대로’라는 격조 있는 악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곡을 부를 때 악보대로 부르는 것보다 악보를 위와 같이 약간 변형하여 우리말 가사를 살려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작곡가 플로렌스 여사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차후에 찬송가를 개정할 기회가 온다면 과감하게 수정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노래에서 음과 리듬 보다 중요한 것은 가사입니다. 가사를 더 잘 살려 낭송하다가 악센트가 생겼고 그 가사를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선율을 붙여 노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말과 영어는 구조적으로 매우 다릅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원곡의 음과 리듬을 살리며 번안하되 그 과정에서 어색함이 발생했을 때는 음과 리듬을 우리말에 맞게 가다듬는 것이 좋습니다. 노래는 모름지기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플로렌스 호튼 여사가 그랬듯이 우리말과 우리의 영성을 살린 우리의 찬송가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조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