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의 굴욕(Blue Jasmine)
“진저”네 집에 얹혀사는 “재스민”
딸아이가 넷플릭스(Netflix)를 구독하기에 이따금 꼽사리를 끼어 영화를 볼 때가 있습니다. 물론 딸이 보지 않을 때에만 로그인을 할 수 있지요. 최근에 좋은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우디 앨런(Woody Allen, 1935∼)이 연출한 『Blue Jasmine』(직역하면 “우울한 재스민”이지만, 스토리 전개상 “재스민의 굴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입니다. 제가 아는 앨런은 영화감독일 뿐 아니라, 각본가요 극작가요 배우로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천재 예술인입니다. 그 유명한 “아카데미 상”(Academy Awards)만 네 차례 수상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다가 한국계 입양아 출신 오순이(Soon-Yi) 씨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요.
영화는 뉴욕 맨해튼의 자산 관리인으로서 백만장자요 사교계의 명사인 할 프랜시스(Hal Francis)의 아내 재스민 프랜시스(Jasmine Francis)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죄로 구속되고 파산하게 되자 재스민은 어쩔 수 없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 집에 얹혀살게 됩니다. 여동생 진저(Ginger)는 재스민과 함께 입양된 자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재스민에게 구박만 받아온 좀 덜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여성입니다.
재스민은 언제나 자신의 DNA가 진저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을 가졌고, 그 때문인지 거부의 아내가 돼 뉴욕 중심부에서 날마다 파티가 그치지 않는 초호화판 생활을 즐깁니다. 그러나 동생은 노동자 계층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근근이 살아갑니다. 남편과 이혼한 뒤 허름한 아파트에서 두 아들을 기르며 껄렁껄렁한 자동차 수리공과 아슬아슬한 연애 행각을 벌입니다. 어려서부터 자기를 업신여겼고 결혼 후에도 자기와는 달리 초일류 생활을 누리던 언니가 쫄딱 망해서 자기집에 얹혀사는 신세로 전락하자 진저와 재스민 사이에는 옥신각신 다툼이 계속됩니다.
진저야 어차피 밑바닥 생활이 몸에 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하루아침에 수직 급강하한 재스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초일류에서 최하류로 내려와 새 생활에 적응해야 합니다. 언젠가 여동생 진저와 전(前)남편 오기(Augie)가 맨해튼에 사는 언니 집에 놀러 왔을 때에도 언니 부부는 겉으로는 환영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두 사람을 깔보고 핀잔을 줍니다. 급기야 오기와 진저가 복권이 당첨돼 수령한 20만 불을 할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해 모조리 날려버립니다. 재스민의 남편, 즉 진저에게는 형부요 오기에게는 동서인 할에게 속아 넘어가 사업하려고 준비하던 당첨금을 하루아침에 다 날려버리자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됐고, 그 후부터 노골적으로 할과 재스민을 경멸합니다.
재스민 몰래 여러 차례 바람을 피우던 남편 할의 엽색(獵色) 행각이 탄로 났지만, 할은 그것도 모자라 19살 먹은 프랑스 처녀와 결혼하겠다며 재스민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격분한 재스민은 남편의 사기죄를 FBI에 고발해서 할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에 체포돼 망신을 당하고, 결국 감옥에서 자살하고 맙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최고의 맨션에 살며 최고의 차를 몰고 다니며 이틀이 멀다고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하며 맨해튼을 누비던 재스민은 이제 입에 풀칠이나 하기 위해 가난과 저속한 삶에 찌든 진저네 집에서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굴욕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자존심 하나만큼은 잃지 않고 여동생의 문란하고 천하고 상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에 충고도 하고 어떨 때에는 점잖게 꾸짖기도 하지만, 이전의 당당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날개 꺾인 새요 이빨 빠진 사자처럼 재스민은 진저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우울증과 굴욕감을 다스리고자 홀짝홀짝 마시던 알코올은 어느새 중독증으로 발전하고 항(抗)불안제까지 복용해야 잠을 청할 수 있을 지경이 됐습니다. 게다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꾸만 중얼거리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진저의 새 애인 칠리(Chili)는 정비공인데, 말투나 행동거지가 저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당연히 고상한 척하는 재스민의 마음에 들리 만무합니다. 칠리는 진저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재스민 때문이라며 만날 때마다 재스민의 신경을 긁어댑니다. 그것도 모자라 칠리만큼이나 거칠고 비루한 자기 친구가 재스민을 사귀고 싶다며 추근댑니다. 재스민은 마냥 동생 신세만 질 수 없기에 한 치과 의원의 데스크에 접수 담당자로 취직합니다. 가지가지 진상 손님들을 응대하며 진절머리가 난 판인데, 치과 의사가 성추행까지 합니다. 재스민의 굴욕은 끝이 없습니다.
화려한 재기를 꿈꾸던 재스민의 재추락
그러다가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고 재스민이 옛날의 영화를 회복할 기막힌 찬스가 옵니다. 샌프란시스코 교외에서 열린 파티에서 부유한 홀아비 드와이트 웨스트레이크(Dwight Westlake)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드와이트는 외교관으로 있다가 아내와 사별한 뒤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준비를 하고있는 잘생기고 품위 있고 세련된 신사입니다. 재스민은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굴욕적인 삶에서 탈출하고자 드와이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외과 의사인 남편이 심장마비로 죽었으며 자기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라고 속입니다.
재스민이 화려한 재기를 꿈꾸며 미래에 펼쳐 칠 장밋빛 환상에 젖어 있는 동안에도 진저의 그렇고 그런 밑바닥 삶은 계속되고 있는데, 재스민은 이런 진저가 한심하다는 듯이 늘 끌끌 혀를 찹니다. 재스민에게 홀딱 반한 드와이트는 마침내 재혼을 결심합니다. 두 사람은 값비싼 보석가게에 들려서 약혼반지를 고르는데, 바로 이때 “짠”하고 나타난 원수가 있으니 진저의 첫 남편 오기입니다. 오기(Augie)는 오기(傲氣)를 부립니다. 재스민의 전남편 할과 재스민이 어떻게 사기를 쳐서 자기의 재산을 말아먹었는지에 대한 절대 비밀을 폭로합니다. 결국 재스민의 거짓과 위장에 단단히 실망한 드와이트는 재스민을 떠납니다.
다시금 날개를 달고 창공을 향해 비상하려던 재스민의 야심은 땅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화려한 옛 생활로 복귀하려던 꿈이 산산조각 깨진 다음에 재스민은 진저의 아파트로 돌아옵니다. 아파트에는 볼썽사나운 진저와 상스럽기 짝이 없는 애인 칠리가 시시덕거리며 재스민을 한껏 조롱합니다. 이제 진저는 더 이상 언니 편이 아닙니다. 아예 아파트로 쳐들어와 살림을 차린 칠리 편을 들면서 칠리가 재스민을 비웃을 때마다 맞장구를 칩니다.
재스민은 더 이상 진저네 집에서도 살 수 없게 됐습니다. 재스민은 드와이트와 결혼할 거라며 짐을 꾸려 아파트를 떠납니다. 누구도 오라는 사람이 없는 외롭고 쓸쓸한 거리에 차들은 온갖 소음을 일으키며 속절없이 지나가는데 재스민은 공원 벤치에 앉아 주절주절 뜻 모를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한 인생이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곳으로 추락해 굴욕을 당하는 슬프면서도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코미디 드라마였습니다. 줄거리도 공감이 갔지만 배우들의 열연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맡은바 각자의 배역에 따라 정말 그런 인생을 실제로 사는 것처럼 리얼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재스민 역을 맡은 호주 출신 여배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 1969∼)의 연기는 압권(壓卷)이었습니다. 블란쳇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까지 받았습니다.
잘나가는 백만장자의 아내요 사교계의 명사로서 우아하고 품위있고 세련된 삶에 젖어있던 재스민 프란시스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돼 늘 업신여기며 못마땅하게 여기던 여동생 진저보다도 더 열악하고 참담한 환경으로 굴러떨어지는 장면들을 블란쳇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연기했습니다. 그녀의 말투며 몸동작,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굴욕을 당할 때마다 마음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좌절과 허탈과 체념과 무력감 등등의 복잡한 심리작용이야말로 영화를 지켜보는 관중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만일 내가 재스민과 같은 처지라면 나도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겠지” 하고 공감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기
저는 영화를 지켜보는 내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일도 어렵습니다. 젊은이들이 하는 말처럼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올라가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계층 상승에 대한 꿈과 야망은 가질 수 있고, 또 주변에는 “개천에서 용 나듯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최고 수준의 삶을 구가(謳歌)하던 유명 인사가 갑자기 쫄딱 망해 수직 낙하했을 때의 그 민망함과 좌절감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2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가 되는 삶”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과 “십자가 정신”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듯 예수님 닮은 그리스도인의 삶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섬기는 삶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는 강한 자가 됐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자들에게는 부자가 됐다” 혹은 “권력자들에게는 권력자가 됐다”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가 됐다”라는 고백만 있습니다. 사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다 강자도 될 수 있고, 약자도 될 수 있습니다. 신분과 계급이 높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강자가 되고, 낮다고 해서 자동으로 약자 부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경제, 건강 등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번갈아 가며 강자와 약자 자리에 처하게 됩니다.
앞에서 소개한 재스민이 강자로 있다가 하루아침에 약자로 굴러떨어진 경우입니다. 재스민은 강자로 있는 내내 자신이 약자로 규정한 진저를 깔봤습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자신도 약자의 처지로 떨어져 보니까 자기가 진저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진저는 하류 계층의 삶에 불편을 느끼지 않고 익숙할 뿐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정직한 데 반해서, 자신은 여전히 화려한 옛날을 그리워하며 또다시 정점에 올라갈 궁리만 하는 속물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약자가 되기 전에는 약자의 설움과 슬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Next!
저는 영화를 보고 난 뒤,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가 됐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곱씹어 본 다음에 오래전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 1928∼2015)의 설교 한 편(누가복음 3:15-22를 본문으로 한 “And Jesus Also”)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크래독은 최고가는 설교자요 설교학 교수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감리교 계통의 에모리(Emory) 대학교의 특대 교수(Bandy Distinguished Professor of Preaching and New Testament)로 학교가 자랑하는 간판스타였습니다.
크래독은 노년에 길랭-바레 증후군(Guillain-Barré)이라는 병에 걸려 조지아주의 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신체의 면역계가 말초 신경계 부분을 공격해서 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입니다. 크래독은 몸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증세가 심했습니다. 여러 주에 걸쳐 재활 치료를 받던 차에 크래독은 다른 동료 세 사람과 함께 “홀로 서기”(stand alone) 연습을 하게 됐습니다. 의료진과 가족, 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 명의 환자가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지요. 두 개의 막대기를 세워놓고 휠체어를 굴려 그곳까지 간 뒤에 휠체어에서 일어나 막대기를 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환자가 일어난 뒤에 의료진이 막대기를 치우면 10을 셀 때까지 혼자 힘으로 서 있어야 하는데, 성공한 환자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상으로 주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게 됩니다.
제일 먼저 중풍으로 입원한 찰리(Charlie) 차례입니다. 찰리는 입이 축 늘어져 침을 질질 흘리며 말도 하지 못합니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닌 것이 전부이고 젖소 농장을 운영하는 촌로입니다. 크래독은 찰리의 모든 것이 좋았지만, 식사 때마다 침을 너무 많이 흘려 동석하는 것만큼은 싫어했습니다. 모두가 기도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1번 타자로 찰리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만 셋을 셀 때 풀쩍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2번 타자는 얼(Earl)입니다. 바퀴가 18개나 달린 대형 트럭의 운전사입니다. 몸집이 크고 건장한 사내이지만 매우 거칠었습니다. 이를 악문 얼은 10을 다 세고 20을 셀 때까지 홀로 서 있어서 거뜬히 시험에 합격했고 큰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엘리자베스(Elizabeth)는 교사로 정년퇴직한 독신녀인데 홀로 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고 다쳐서 병원에 왔습니다. 훌륭한 여성이었지만 자기를 어린아이처럼 다루는 재활 치료사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엘리자베스도 10을 셀 때까지 잘 버텨서 합격했고 아이스크림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크래독 차례가 왔습니다. 앞에서 세 사람이 홀로 서기 시험을 치르는 동안 크래독은 초조하게 자기 차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도우미가 자기 차례를 알릴 때 그는 은근히 이런 소개를 기대했습니다. “Next we have Dr. Fred B. Craddock, Rev. Dr. Fred B. Craddock, the Bandy Distinguished Professor of New Testament and Preaching at Candler School of Theology, Emory University.” 그러나 여성 담당자의 소개는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Next!” 다행히 64세의 크래독도 10을 셀 때까지 일어서 버텼고 박수와 아이스크림을 부상으로 받았습니다.
이날 속으로 기대했던 거창한 소개와 달리 “next!”라는 그 한마디가 크래독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습니다. 자기도 나머지 세 환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하체가 마비된 환자에 불과하다는 냉엄한 현실을 자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크래독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장면을 떠올립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날고 기는 사람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이뤄 기다리고 서 있었을 때 예수님도 대열에 끼여 자기 차례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눅 3:15-22). 드디어 예수님 차례가 왔을 때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크래독은 “Next!” 이 한마디가 전부였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혹여나 우리 마음이 높은 곳에 가 있었다면 낮고 천한 이 땅에 죄인의 형상으로 오셔서 잔혹한 십자가 형틀에 죄인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하심”(下心), 마음을 낮춥시다. 때마침 아베 신조(安倍 晉三, 1954∼2022. 7. 8.) 전 일본 수상이 총격으로 피살됐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요 최연소 최장기 총리대신이자 일본 극우 민족주의의 아이콘이 순식간에 풀썩 쓰러지는 장면은 너무도 쓸쓸하고 허망했습니다.
김흥규/내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