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자부심
아르메니아에서 조지아(그루지야)로 건너왔다. 두 나라 사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400m 공간을 홀로 걸어가는 것이다. 입국심사는 아주 간단하였다. 아제르바이잔 등 몇 나라를 빼면 세계 어디에나 통하는 대한민국 여권의 힘은 이곳에도 예외가 없었다. 조지아의 첫인상은 가난하고 불편해 보인다. 국경지대는 어디든 썰렁하고 낯선 법이다. 멀리 산 위의 십자가는 외롭게 느껴졌다. 조지아는 아르메니아(301년), 로마(313년)에 이어 세 번째로(326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오래전에 조지아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본 적 있다. 얼마나 황량한지 산은 위험하고, 들은 황무지와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양과 소를 돌보는 목동들의 신세가 참 고달프게 느껴졌다. 그런 조지아이지만, 멋있게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다. 동료 목동들끼리 어울려 밥을 먹을 때나, 길가는 나그네와 합석할 때에 멋진 건배사를 하였다. 목동들은 자신의 안전과 양들을 위해 수시로 복을 비는 기원을 잊지 않았다. 목자로서 자부심이다.
그들은 양 떼와 함께 이동할 때에 수도원 근처를 지나치거나, 다급한 일을 만날 때면 수시로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다. 조지아 정교회 성호다. 양을 보호하는 목자인 그들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절절히 소망한다. 목동만이 아니다. 트리빌시 시내를 걷다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참 많다. 성전을 바라보고 멈춰 서서 성호를 긋고 무릎 인사를 하는 사람, 보도를 걷다가 도로 곁 성인 부조상에 입을 맞추는 사람을 흔히 본다. 일상의 경건이 눈부시다.
트리빌시는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조지아 정교회의 도시는 저녁마다 축복하듯 하늘을 물들인 맑은 노을로 평화로웠다. 산 위에서 우묵한 시내를 내려다보는 게오르규 어머니 상은 은빛으로 찬란하였고, 사방 어디에든 존재하는 예배당과 십자가들은 공간의 거룩함을 느끼게 하였다. 포도와 석류, 자두와 수박 등 과일은 얼마나 달고 풍성한지, 여름의 풍요가 따로 없었다. 트리빌시에 몰려든 유럽의 관광객은 그야말로 휴가 인파였다. 주일예배를 드리는 시오니 교회는 신자와 관광객이 뒤섞여 가득하였다.
조지아의 휴가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북쪽 카즈베기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진다. 캅가즈 산맥을 넘는 즈바리 고개는 높이가 2,390미터인데, 오르내리는 산등성이 풍경이 장관이다. 여름에는 피서객이, 겨울에는 스키 객으로 몰린다. 이곳은 러시아 국경으로 연결되는 군사도로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20만 명이 죽었다. 그들은 캅카즈 산맥을 통과하는 군용도로를 만들었는데, 그 길이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우회하는 각국의 대형 트럭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 길의 끝에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전해지는 만년설 카즈베기 봉(5,033미터)이 우뚝 서 있다.
조지아 정교회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달리 십자가의 유명세가 없었다. 얼마나 곤혹스러웠던지, 이틀째가 되도록 십자가다운 십자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포도나무 십자가는 눈을 의심할 만큼 정갈하였다. 14년 전, 미국 동부 나파밸리에서 포도나무 십자가를 찾으려고 덤볐다가 실망만 컸는데, 조지아는 역시 기품있는 포도나무 십자가를 보유하였다. 이를 ‘니노 십자가’라고 부른다. 니노는 조지아에 처음 복음을 전한 성녀로 ‘사도와 동등한 니노’라고도 불리는데, ‘깨달음을 주는 자(the Enlightener) 니노’로서 높임을 받고 있다.
조지아의 가장 큰 자랑인 포도나무의 명예는 바로 니노의 몫이었다. 무려 8천 년 전에 조지아에서 최초로 포도농사가 시작되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 당국이 조지아는 포도주를, 아르메니아는 꼬냑을 주 상품으로 지정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대대로 가족 산업으로 포도 농장을 이어온 카츠비 가문은 정교회에 성찬용 포도주를 기부한다며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만큼 조지아 와인은 자긍심 그 자체였다.
즈바리(포도나무) 수도원은 조지아인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4세기 초 성녀 니노가 기도를 드린 후 포도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세웠는데, 나중에 그 자리에 즈바리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결국 조지아 정교회의 십자가 수집은 비록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에서 구한 몇 점이 전부이나, 아쉬운 대로 조지아 컬렉션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2008년 조지아는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며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럼에도 어디든 러시아 관광객은 찾아왔다. 서로 언어가 통하는 만큼 민간의 교류는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첫날 조지아식으로 저녁을 먹은 샤비 로미 레스토랑 영수증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러시아 점령지역에 거주하는 조지아 국민은 20% 할인.” 역시 조지아다운 자존심이었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