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보고서
꼭 20년 전에 귀국하였다. 1994년 봄에 독일로 떠날 때만 해도 그곳 한인사회는 무척 젊었다. 교회 안에서 비교적 연배가 있는 분들은 이제 50줄에 막 들어섰다. 40대 교민이 주류를 이루고, 30대의 유학생들이 함께 하는 복흠교회는 무척 자유롭고 발랄하였다. 목사로서 8년 반 동안 가장 많이 치룬 의례가 있다면 만 50세 생일을 맞은 교우들의 ‘50 생일 축하연’이었다. 독일은 한국과 달리 회갑이 아닌 희년(Jubileum)을 가장 큰 생일로 축하한다.
내가 일한 교회는 충분히 개혁적인 공동체였다. 복흠교회의 경우 제직회를 구성할 때 2년에 한 번씩 선거를 하였다. 입교인 120명의 10%인 12명을 집사로 뽑았는데, 대개 기존 제직회 멤버 중 7~8명은 다시 당선되고, 4~5명은 물갈이 대상이었다. 행여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할까 싶어 투표기간을 무려 한 달 간 길게 잡았다. 자칫 인기투표로 흐를 수도 있으나, 기우였다. 평소 교회를 위해 일할만한 이를 눈여겨 본 교인들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승강제를 닮은 제직회 선거의 투표결과에 모두 동의하였다. 그런 만큼 제직회는 책임과 소신을 지녔다.
그곳은 유럽대륙 한복판에 존재했으나, 때론 섬과 같았다. 늘 한국을 그리워하였지만 돌아갈 용기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20대 젊은이들은 광부와 간호사로 일자리를 찾아 독일로 왔다. 3년 혹은 5년의 체류 허가가 무기한의 시민의 권리로 바뀔 때, 그것이 평생 머물러야 할 의무 아닌 의무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세월은 어김이 없었다. 그들은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용기있는 개척자였다. <제7의 인간>을 쓴 존 버거의 말대로 “이주 노동자는 그 시대에 가장 진보적이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독일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그해 가을, 인근 도시 레클링하우젠 요한네스교회의 초대를 받아 외국인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공동으로 인도하는 위르겐 슈바크 목사님과 나란히 색동스톨을 하였다. 한국인교회의 입장에서 이렇게 인사하였다.
“여러분을 방문한 우리는 한국인교회에 속한 교인들입니다. 우리는 2-30년 전에 루르지역의 광부와 간호원으로 독일 땅에 왔으며 이곳에서 결혼하고 딸과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교인들은 이곳에 오자마자 교회를 세웠고 복흠교회는 2주 전에 24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부모들은 꿈으로라도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지만 자녀들은 독일 땅인 복흠과 레클링하우젠이 고향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번번이 2세들이 열어 갈 미래를 준비하려 하지만 한국이 아닌 독일의 삶은 항상 우리에게 어려움이 됩니다. 말이 다르고 음식이 다른 것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 차이에 따른 잘못된 이해는 때론 우리로 하여금 설 자리를 잃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독일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많은 외국인들은 단지 국적의 차이 때문에 점점 심각해지는 도전과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계획한 외국인을 위한 예배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1994.9.25.)
그리고 2020년에 복흠교회는 50주년을 맞았다. 귀국 무렵만 해도 향후 은퇴시대를 고민하던 분들은 더 이상 고민할 청춘조차 놓쳐 버렸다. 긴장된 제직회 선거를 치룬 끝에 집사로 당선되어 교회운영을 명예롭게 감당하던 젊은 마음들은 이제 스스로를 짐으로 여긴다. 50년 주년을 맞던 해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연기 또 연기한 끝에 이번에 독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도착하면 맨 먼저 할 일이 그동안 먼저 떠난 옛 교우들을 심방 하는 일이다. 독일의 공원묘지에 머물고있는 분들이 무려 9분이다.
28년 전, 그 시절은 무엇이든 할만했던 청춘 시절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들과 어울리던 그때는 목회자로서 할 만한 일을 하고 살았다. 처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던 날, 그리고 다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돌아오던 날, 긴 시차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설레임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번에는 어떤 감정이 들까? 그런 기대감으로 4주간의 여정을 시작한다.
“어느 곳에 도착하여 첫날 보면 사람 사는 것이 다 달랐다. 그러나 3일 같이 살다 보면 사람 사는 것은 다 같았다”(김찬삼).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