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아름다운 봄날. 대학교에서 단대별 과대항 장기자랑이 열렸다. 호기심과 관심으로 관람하게 된 장기자랑은 역시 젊은이다운 열기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 기분 좋은 열기가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무언가 결여된 느낌이랄까..?
그 결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치성’이었다. 대학생들의 향연은 묘하게도 철저하게 비정치적이었고 탈정치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정치성’이라는 단어는 결코 특정한 당이나 인물을 지지하거나 배척하는 파당적 의미에서가 아니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즉 모든 인간의 사회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다.
테렌스 데 프레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다룬 '생존자'라는 책에서 ‘정치적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적이 있다. “정치적 인간이란 그 사회 내의 다른 사람들과 드러나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이 문장이야말로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가장 적절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렇다. 정치적 인간이란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거창한 연대나 참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따라서 누군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 고통이 내게도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그 최소한의 인식 말이다.
연결을 의식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흔히 식탁에서의 감사기도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드리곤 한다. “지금 어딘가에선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내용은 다를지라도 이 기도의 모형은 특별히 감사기도에서 자주 등장한다. 타인은 불행하지만 나는 행복하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하지만, 이게 정말 감사할 이유일까?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할 때,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의 이유가 된다. 나는 타인의 불행에 빗대어 나의 행복을 가늠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면 더 이상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타인의 불행은 행복의 이유가 아니라 나의 고통이 된다. 그가 굶주린 이유는 내가 넉넉히 먹기 때문인 것이다. 타인의 불행은 내 책임이 되고, 감사의 이유가 아니라 회개의 이유가 된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연결을 의식할 때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되지 않는다. 그는 나와 연결된 한 몸의 지체인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라고, 우리는 한 몸이며 각각의 사람은 그 한 몸의 지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일까?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타인의 고통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첫 걸음이 아닐까?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엡 4:16)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