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날씨가 덥다는 핑계로 올해의 농사는 적기에 심는 시기를 놓치고 있다. 고추도 그랬고, 참깨도 그랬으며, 콩도 그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으려 한 들깨도 거의 2~3주를 늦게 심고 있다. 더위 뿐이랴. 장마도 핑계로 삼기 좋고, 트랙터 없는 것도 그렇고, 혼자서 넓은 밭을 한다는 것도 핑계라면 핑계다. 결론은 올해의 농사에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딱히 판매를 하여 수익을 올릴 것도 아니고, 팔아서 생계에 도움을 줄 만하지도 않고, 대략 열리면 먹고 안 열리면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커서 여러 핑계에 의지하여 올 농사를 보낸다.
고추를 보자. 고추 2판이면 150주 정도 된다. 긴 두둑 2줄을 심었다. 작년과 비교했을 때 고춧가루 10근이면 족하다. 그런데 올해의 날씨는 5월 중순까지 일교차가 심했다. 냉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지 열대 농작물이라 할 수 있는 고추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웠던 기온이었다. 그 때문에 고추는 한달 이상 자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상태로 멈춰있다가 6월에야 치솟는 기온에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50센티 정도 자랐을까? 고추도 이제 겨우 내 새끼손가락 만한 크기로 매달려 있다. 옆집에 사는 반장님네 고추와 비교를 한다면 난 완전 피라미다. 반장님네도 작년보다는 늦게 자란다고 하였어도 나와 비교한다면 그분네 것은 완전 고추 달인이요 박사급이다. 그러나 난 나의 늦자란 고추들을 타박하지 않는다. 그저 죽지 않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울 지경이다. 이유는 또 있다. 30도 이상이 되는 기온과 가뭄이 이어질 때 자라지도 못하고 낑낑대고 있었던 고추들은 거의 모두 개미와 진딧물의 희생양이 되었다. 고추의 수분을 먹고 사는 진딧물의 공격과 진딧물을 고추로 유인하는 개미로 인해 가뜩이나 안쓰러웠던 고추의 삶은 그야말로 초토화 직전이었다. 그런 것이 지난 2주 전 쏟아지는 장맛비에 이제 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난을 겪고 있는 고추들이 그 수난을 지금까지 견디고 있는 것이 기특하여 볼 때마다 박수를 보내고 있다.
참깨는 어떠한가. 정말 다섯 번을 내리 심은 것 같다. 참깨 순이 올라온 곳과 미처 올라오지 않은 곳을 살피면서 일주일에 한번 꼴로 씨를 심었다. 나중에는 참깨도 개미들의 폭격으로 씨가 마르기 시작하여 심은 참깨 중에 3분의 1은 포기를 해야 했다. 적기를 놓쳤을 뿐 아니라 설령 지금 뿌려 자란다 해도 수확까지는 이제 두 달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완숙된 열매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더 살피는 것이 제격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황당한 일을 당했다. 냥이들에게 아침밥을 주고 참깨밭을 둘러봤는데 저 멀리에 하얀 물체가 왔다갔다 하였다. 처음에는 집에서 거두는 하얀 고양이가 용변을 보는 것이라 여겨 별반 신경을 안썼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웬걸? 흰토끼다. 오물오물 무언가를 씹고 있길래 풀을 먹는줄 알았는데 허걱! 이 녀석이 참깨잎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지껏 참깨 도둑으로 개미와 새만 쫒아냈는데 토끼도 한 동지였다. 게다가 토끼는 잘 자라는 참깨의 밑둥까지 갉아먹으니 농작물을 해치는 주범 중에 주범인 셈이었다. 얼마나 얄밉던지 막 달려가 혼내주려 했더니 토끼는 잡을테면 잡아보란 식으로 폴짝폴짝 뛰어 콩밭으로 도망을 갔다.
콩밭으로 달려갔다. 아, 그랬더니, 이 토끼가 콩순도 야물지게 먹고 있는게 아닌가. 콩밭에는 새와 고라니가 서식하여 늘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토끼는 콩밭에서도 한무리가 되어 콩을 망치고 있었다. 토끼가 그중에 제일이었다. 새는 막 나오는 콩순을 먹고, 고라니는 연한 순을 따 먹는다. 거긴까지는 나도 이해한다. 그런데 토끼는 콩순은 물론 연한 콩대까지 먹고 어떤 콩은 아예 뿌리까지 뽑아 먹고 도망을 갔다. 좀 열이 받았다. 그래서 작은 돌을 들어 녀석을 향하여 던졌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몸을 향해 던지고 싶었지만, 어찌 마음으로 던질 수 있으랴. 돌이 풀숲에 두어번 떨어지자 토끼는 날쌔게 도망을 쳤다. 다음에 보이면 이번에는 마음을 다해 던지리라 다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녀석은 콩이란 콩은 모두 해치울 것이며, 참깨란 참깨는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그뿐이랴. 윗집에 사시는 목사님네 밭의 양배추와 상추, 고추 등 다양한 먹을거리가 토끼에 의해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다음에 나에게 발견이 되면 내 마음을 다해 농작물을 해치는 토끼를 잡아보리라.
이렇듯 올해의 농작물에 대한 나의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되지도 않을 것에 너무 마음을 다하면 마음 고생이 심해진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에까지 신경을 쓰다 보면 욕심이 과하여 몸을 망칠 수 있다. 어차피 심는 적기도 놓치고, 기후도 딱히 받쳐주지 않으니 올해의 농사는 사심을 버리고 잘 자라든 못 자라든 있는 작물을 살피고 주어진 열매에 만족하기로 한다. 그래야 편하다.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