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요즘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이 든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교회가 문제가 되어서 언론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면 과연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결국 복음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예수를 믿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가 변화되지 못한다면 결국 복음은 어떤 능력도 없는 것이 아닌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안위와 평안에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복음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 능력이 있기 때문에 2천년의 역사를 이어왔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교회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예는 역사상 수 없이 많이 있었다. 멀리 남의 나라 이야기를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 가운데서도 그러한 역사는 있었다.
강화도에 가면 홍의교회라고 있다. 이 교회가 1896년 설립되었으니 선교 초기의 교회다. 당시 홍의리에 박능일이라는 마을의 훈장이 있었다. 이 분이 들으니 옆 마을 교산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 분이 유교학자로서 분노하여 교산리의 김상임이라는 양반을 찾아갔다. 거기서 논쟁을 벌이가 오히려 박능일이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교회를 설립하였다. 교회 가운데 복음을 함께 나눈 이들이 크게 변화되었다.
어느 날 첫 교인 7명이 모였다. 이들은 복음으로 우리가 변화되었으니 이름을 바꾸자고 하였다. 그래서 성경 가운데 의미 있는 글자 일곱을 뽑았다. 그것이 능(能), 순(順), 경(敬), 신(信) 봉(奉), 천(天), 광(光) 등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성은 간직하고 이 가운데서 한 자를 뽑아 중간자를 삼았다. 그리고 마지막 자는 항렬을 맞추는 돌림자로 한 일(一)자를 썼다. 그래서 이름을 박능일, 종순일, 권신일 등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유교적 전통과 체제를 가지고 있던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민의 구분을 깨고,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한 돌림자를 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한 형제임을 나타낸 것이다.
또 이들 가운데 한 부자는 마을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서는 빚문서를 태우며 이제 내게 빚진 이는 없다고 선포했다. 또 어떤 이는 노비들을 모아 놓고서는 예수 안에서 주인과 노예가 있을 수 없다며 노비문서를 태웠다. 그리고 이들은 재산을 정리하고 강화도 주변의 섬들을 돌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은 진지하게 우리에게 달라진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되어지기를 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롬12:2)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복음의 능력은 증명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복음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리라 믿고 있다.
조성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