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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6-21 00:05
   
《아무도 모른다》 (誰も知らない, 2004)
 글쓴이 : dangdang
조회 : 69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7715 [145]


 

《아무도 모른다》 (誰も知らない, 2004)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칸 영화제는 프랑스의 작은 해안도시 칸(Cannes)에서 열리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다. 이 칸 영화제에서 올해는 유달리 많은 한국 영화와 한국 배우들이 눈에 띄었다. 그간 높아진 한국 영화의 위상이 반영된 터일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은 감독상을 수상했고 송강호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연 여배우가 중국인 탕웨이라는 점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송강호가 출연한 영화 《브로커》를 연출한 감독이 일본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점 역시 흥미롭다.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세계적으로 확장된 것 같은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족’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처음 영화의 제목은 《아무도 모른다》였다. 영화는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의 아들을 둔 젊은 엄마가 어떤 집에 세를 얻어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주인은 아이들이 많으면 불평이 많아 곤란한데 의젓한 아들 하나라 다행이라 말하고, 엄마와 아들은 새로 이사 온 셋집에서 짐을 풀기 시작한다. 그런데 커다란 가방에서 작은 아이들 둘이 튀어나오고, 한 밤중에 장남은 몰래 차녀를 밖에서 데리고 들어온다. 엄마는 집주인을 속이고 아이들 넷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이 아이들은 모두 아빠가 다른 아이들이다. 얼마 후, 아이들을 학교조차 보내지 않는 엄마는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돈을 벌어 오겠다며 훌쩍 집을 나가버린다. 이때부터 아이들의 눈물겨운 생존 투쟁이 시작된다. 전기도 물도 끊겨 동네 놀이터 공원에서 물을 마시고 머리를 감는 아이들의 모습은 애교에 불과하다. 부모로부터, 어른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삶은 짙은 비참으로 물들어간다.

 

영화는 1988년, 그러니까 영화가 제작되기 16년 전 일본 도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 속의 상황이 발견될 때까지 주위에서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초등학생 장남은 그해 칸 영화제에서 《올드보이》의 최민식과 경쟁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최연소 기록이다. 영화가 아이들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방식은 놀랍도록 차분하고 건조하다. 극적인 음악이나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눈물겨운 상황 속에서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울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더 깊이 마음에 박힌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데에는 또 다른 오해의 이유도 있다. 영화가 끝나고 먹먹한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올라가는 화면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무책임의 극치를 달린 철없는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엄마 역 배우의 이름으로 ‘You’가 떠올랐던 것이다. You라니,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이 바로 이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구나,라고 당시에는 충격 속에 생각했었다. 나중에야 그 일본 배우의 실제 이름이 You라는 것을 알게 된 멋쩍었던 해프닝이 이 영화의 추억에는 함께 담겨 있다. 하지만 분명 해프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오해는 신비한 우연의 메시처럼 영화와 함께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이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은 내 주위에 보이지 않는 채로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주님은 준엄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마 25:42-43) 그때 영벌을 받을 자들의 변명은 이것이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마 25:44)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모른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섭게도 이미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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