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지키는 스승의 주일
지난주 한 장로님께서 제가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돌아오는 주일이 5월 15일 스승의날인데요, 5월 첫 주 주일은 어린이 주일, 둘째 주는 어버이 주일로 드려지는데 혹시 셋째 주는 스승의 주일로 드려지나요? 제 기억엔 우리 교회에서 스승의 주일로 드려진 기억이 없긴 합니다만, 기도를 준비하다가 궁금해서 갑작스레 여쭤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발한 질문입니다. 듣고 보니 어린이날,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날이 5월의 3대 기념일인데 교회에서는 유독 ‘스승의 주일’만을 지키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질문과 정성껏 기도를 준비하시는 장로님의 모습에 미소를 머금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로님, 정성껏 기도를 준비하는 모습이 너무 귀하세요. 감리회의 공식적인 교회력에 따르면 이번 주일은 ‘청년 주일’입니다. ‘스승의 주일’은 따로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목회자가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여기거나 그런 대접을 받으려 하기 보다는 모든 이들의 참된 스승이신 주님만을 높이고 오히려 성도들을 겸손히 섬기라는 의미로서 스승의 주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번 주일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스승의날 당일이기 때문에 기도문에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거나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영적 은사님들에 대한 멘트를 넣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답해 드렸지만 솔직한 맘으로는 그런 말씀조차 드리기 민망할 따름입니다. 우리 주님을 제외하고 교회에서 굳이 스승을 논한다면 그것이 꼭 목회자여야 한다는 법도 업거니와 성도님들은 기도할 때마다 목회자들을 위한 문구를 빼놓는 법이 없으시고 언제 어디서나 늘 가장 우선적으로 목사들을 배려해 주시며 의식주를 막론하고 늘 극진한 마음으로 매일을 스승의날처럼 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과분한 사랑과 섬김을 받는데 또다시 스승의 주일을 정할 정도로 목회자들은 염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교회학교에서 헌신하시는 교사들을 위한 감사의 순간은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변방의 글을 읽고 계실 정도로 기독교 신앙과 교회 생활에 가까이 계시다면, 분명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눈물로 기도해 주시고 신앙의 본이 되어 주셨던 선생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군인교회의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저를 직접 가르치시지는 않았지만 사역 중에 만났던,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셨던 많은 교회학교 선생님들도 생각납니다. 그런 분들을 떠올리는 가운데 지금도 각자의 교회 안에서 교사로 헌신하시는 분들께 감사하며 격려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감리회 교회력에는 그와 같은 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장통합의 경우에는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기 전인 7월 초에 교회학교교사주일을 제정하여 지킵니다. 기장교단은 5월 첫째 주일을 교회교육주일과 어린이·청소년주일로 겸하여 지킵니다. 온 교회는 교역자들보다는 사례비 한 푼 받지 않고 헌신 봉사하시는 평신도 교사들에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교회의 선생님들을 귀하게 여겨야 교회의 미래에 희망 있고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음악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 관계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과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일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1783년 비엔나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이든은 당시 51세였고, 모차르트는 27세였습니다. 그 둘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제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강호의 고수들이 서로 무예의 합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듯 그들은 서로의 음악을 통해 서로를 알아봤고 가르침을 주고받았으며 교제를 했습니다. 삶의 빈자리가 많았던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파파’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고 하이든 또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깊이 아꼈습니다. 신분적인 한계와 엄격한 아버지에게 눌려있었던 모차르트를 하이든은 늘 칭찬하고 격려했습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부드러운 인격에 감화되었고 하이든과의 만남을 통해 천상을 배회하던 그의 천재성이 인간다움에 뿌리내린 예술로 전이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통해 바로크의 대위법을 접했고 하이든을 만난 이후로는 음악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들은 서로를 깊이 존경했던 동료요 친구의 관계였습니다.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 주었던 하이든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차르트 후기의 수많은 위대한 작품들, 레퀴엠, 마술피리, 클라리넷협주곡 등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1791년, 모차르트와 헤어진 지 1년 만에 런던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하이든은 ‘그의 죽음 앞에 한동안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이를 이토록 빨리 데려가신 하나님의 섭리를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애통해했습니다.
1785년, 그들이 비엔나에서 한창 만남을 이어갈 때, 모차르트는 ‘하이든 4중주(K. 387, 421, 428, 458, 464, and 465)’를 완성하고 다음 날 하이든을 집으로 초청하여 음악을 들려주고 이탈리아어로 직접 쓴 헌사와 함께 헌정합니다. 그것은 한 작곡가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존경의 표시이며 또 다른 작곡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였습니다. 모차르트의 헌사는 지독한 우리의 편견과 달리 그가 얼마나 진실하고 순박하며 진중하고 격조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하이든께...이 도시에서 머무르는 동안 당신은 나의 작품을 좋게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큰 용기를 내었습니다. 내가 이 작품을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에게 인정받을 것을 희망한 것은 바로 그러한 관대함 덕분이었습니다. 부디 이 작품을 받으시고 그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부디, 창작자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단점들을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과의 우정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저와 그 우정을 이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 진심을 담아, 사랑하는 친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하이든은 이에 다음과 같이 화답하여 모차르트의 아버지께 편지를 전합니다. 당시 음악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던 하이든의 편지가 가진 힘은 대단했습니다. 아마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나도 높았던 아버지로 인해 인생 전반에 걸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차르트를 위한 세심한 배려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정직한 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당신의 아들은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진정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작곡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을 바라보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며 알건 모르건, 좋은 교사이건 반면교사이건 간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누가 참된 스승일까요?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스승과 제자 관계는 ‘관계’라기 보다는 ‘커넥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참된 스승은 하이든처럼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때로는 동료 같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 같은 관계 속에서 그의 부족함과 결핍을 채워 주며 그의 잠재성을 끌어내 주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스승의 주일은 없지만, 이번 주일은 혼자서 조용히 예배 후 남아서 ‘스승의 주일’로 기념하며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신 모든 스승님들, 그리고 지금도 교회학교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께 하이든에게 헌사를 쓰는 모차르트의 마음으로 정성스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스승님들, 모든 교회학교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조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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