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Il Vangelo Secondo Matteo, 1964)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예수 그리스도를 소재로 한 영화를 꼽을 때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영화가 있으니 그 영화는 바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의 《마태복음》이다. 사순절을 맞아 되새겨보는 마지막 예수님 영화로서도 파솔리니의 《마태복음》은 선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 《마태복음》은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룬 예수님의 영화로 인정받는 영화다. 흑백의 저예산 영화, 그것도 주류 할리우드영화가 아닌 낯선 이탈리아 영화가 어떻게 이런 특별한 영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 《마태복음》의 특별함은 먼저 영화의 감독인 파솔리니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이었던 파솔리니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허상과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주력했다. 전체주의 아래 고통당하는 비참한 서민계급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의 시도는 《마태복음》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별함은 영화의 제목에서 나타난다. 《마태복음》, 즉 파솔리니는 오직 마태복음에 근거한 예수님의 이야기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는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도, 한밤중에 들판에서 천사들에게 고지를 받고 달려온 목자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사로의 부활도, 도마의 고백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태복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이 네 복음서를 종합하여 서로 빠진 부분을 보충하면서 예수님의 전 생애를 재구성한 것과 대조적으로 파솔리니는 오직 마태복음만을 대본으로 삼는, 그 누구도 감행해보지 않았던 대범한 시도를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서를 대하는 이 파솔리니의 태도는 우연하게도 성서학에 있어서의 복음서신학의 발전과도 일치한다. 처음 성서학자들은 복음서 자체보다 복음서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개별 일화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복음서 기자들을 예수님에 관한 일화들을 수집한 단순 수집가로 취급했다. 나중에서야 학자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단순한 일화 수집가들이 아니라 각자 고유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복음서 기자들은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라 고유한 관점과 신학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복음을 선포한 사람들로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듣곤 하는 ‘마태의 신학’, ‘마가복음의 신학’ 등등의 명칭이 가능해지게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이런 복음서 연구의 발전을 반영하듯 파솔리니는 신기하게도 《마태복음》이라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요 무신론자였던 파솔리니가 예수님의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 또한 흥미롭다. 교황이 방문한 도시의 교통체증에 묶여 호텔에서 우연히 펼쳐 읽게 되었던 마태복음이 영화제작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영화를 완성한 파솔리니는 “유쾌하고 친밀감 있던 존경하는 요한 23세를 기리며.”라는 말을 처음 화면에 담아 이 영화를 교황 요한 23세에게 헌정하였다. 파솔리니는 예수님을 최고 권력자들에 대항하는 투사의 모습으로 그린다. 그러나 그의 이런 묘사는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놀랍게도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모습을 바로 그렇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지자 예수(마 21:11),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이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복음서들에 대한 선입견이 전혀 없었기에 그는 마태복음이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 어떤 그리스도인보다도 정확하게 파악해낼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이탈리아어로 말씀하시는 격정적인 예수님의 낯선 모습은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안일한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낯선 분이시라는 사실을 떠올리게도 해준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또 얼마나 영화에 잘 어울리는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사회적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주는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재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재미의 자리에 현실을 둔다. 저 옛날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예수께서 보셨을 비참한 서민들의 현실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감정에 대한 호소도, 화려한 음악도, 탁월한 영상미도 찾아보기 힘들다. 흑백의 저예산 영화이기에 감독은 많은 배역에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을 기용했다. 당연히 감정이나 연기의 과장도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평범한 사람들의 무표정이 오히려 영화에 더 진한 현실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동안 사람들의 이 무표정은 점점 무섭게 다가온다. 이 무표정이야말로 현실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수님이 사셨던 팔레스타인 땅 서민들의 삶이, 희망을 품을 힘도 없이 무표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지금 우리들의 삶과 결코 다르지 않았음을 직시하게 해 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은 절망의 현실 속에 있는 인간을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분은 파솔리니의 영화 속에서처럼 우리를 절망케 하는 세력들에 맞서 홀로 싸우시고, 우리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열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고난으로 뛰어들어 죽임을 당하신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사순절에 이보다 더 적절한 예수님 영화가 또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