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함께 살만한 나라를
저상시내버스를 타보셨습니까? 지하철역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도 이용해 보셨는지요? 저도 몇 번, 엘리베이터를 편리하게 사용한 기억이 납니다. 원래 저상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들을 위하여 도입된 이동 수단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인들이나, 임산부, 혹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 그리고 비장애인들까지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승강기가 설치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알고 계시는지요? 아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최근 ‘국민의 힘’ 이준석 당 대표가 연일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백만 서울 시민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한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공권력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준석대표는 수백만 시민의 불편함을 끌어들여서 소수의 장애인을 향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협하고 불편한 입장을 정당화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대표 덕분에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모든 국민이 관심하는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최근에 불거진 문제가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차별 없는 문명국임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로 다뤄온 현안입니다. 다만 대중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을 뿐이지요.
장애인 이동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은 2001년입니다.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리프트 쇠줄이 끊어져 7m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이날 사고로 70대 장애인 노부부 가운데 아내는 사망하고 남편은 두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오이도역 추락 참사’로 ‘전장연’의 전신인 <장애인 이동권 연대>가 생겼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연대’는 2002년 9월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철로를 점거합니다. 장애인 30여 명이 ‘장애인도 이동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치다가 30여 분 만에 모두 연행이 되었습니다. 집행위원장 박경석 씨는 구속되어 철도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추락 참사는 오이도역에서만 일어났던 게 아닙니다. 1999년 6월 혜화역 추락사고와 그해 10월 천호역 사고가 있었습니다. 오이도역 추락 참사 1년 뒤인 2002년 6월에는 5호선 발산역에서 또다시 리프트 추락 사망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고와 참사는 연례적이었던 것입니다. 안전한 이동을 보장해주지 않는 서울시를 향해 장애인들은 목에 사다리를 끼우고, 쇠사슬로 휠체어를 감싼 채 지하철 철로를 점거했습니다. 서울시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들어가 39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실로 서울시로부터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역에 승강기 100% 설치, 저상버스와 장애인 특별교통수단의 도입을 약속받습니다. 국회에서는 ‘교통약자의 이동증진 편의법’이 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요. 장애인의 이동편의시설은 여전히 부족하고, 저상버스의 도입을 가로막는 예외 조항은 그대로여서 장애인 이동권은 완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하다 돌아온 임병도는 대한민국을 ‘거리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는 나라’라고 말합니다(오마이뉴스,2022.3.30). 장애인이 적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기반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회가 장애인 우선 사회라는 것은 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웃 일본도 장애인 우선 사회입니다. 2021년 현재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는 263만 명으로 인구 대비 5.1%입니다. ‘전장연’에 따르면 장애인의 70.5%가 아직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20년, 30년을 집안에서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장애인 지하철 시위를 놓고 출퇴근 시간에 너무 불편을 주었다며 갈등을 부추기는 사람을 보며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수십 년간 투쟁하지 않았다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이 얼마나 이루어졌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장애인들은 얼마나 밖으로 나오고 싶을까요? 그런 장애인을 집안에만 가두어 두는 사회 시스템을 놓고 무감각하다면 우리는 과연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거의 1세기 전에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했던 말을 이렇게 바꾸어 새겨보았으면 합니다. “인간적인 삶을 위한 장애인들의 도전은 비장애인들이 누리는 어떤 권리보다 더 고차원적인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다.”
이광섭목사/전농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