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맛이 조화로운 서울음식 깍두기
며칠 전 선배목사님을 만나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설렁탕이다. 생각해보니 참 오랜만에 설렁탕을 먹었다. 식당의 탁자위에는 깍두기와 배추김치가 각각 통에 담겨 있다. 미리 끓여놓은 설렁탕이니 주문한 지 얼마 안 되어 음식이 나왔다. 한식집에 비해 설렁탕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 간편한 장사다. 탁자위에 김치와 깍두기는 손님이 알아서 꺼내 잘라먹고 주인은 미리 지어놓은 밥과 데운 국을 떠 오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설렁탕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깍두기가 김치보다 맛있다는 것이다. 보통 김치는 잘 익은 김치보다는 양념이 진하게 된 덜 익거나 적당히 익은 김치가 나오고 그와 함께 잘 익은 큼직한 무김치나 깍두기가 나온다. 설렁탕집이나 국밥집의 깍두기는 시원한 단맛과 감칠맛이 강하다. 그래서 늘 김치보다는 깍두기를 더 먹게 된다. 설렁탕집 깍두기가 맛있는 이유는 대부분 설탕이나 사이다에 무를 절여서 수분이 빠진 쫀득한 상태에서 양념한 후 숙성시키기 때문이다.
설렁탕집의 깍두기가 더 손이 가는 이유가 있다. 설렁탕에는 건더기가 별로 없다. 고기 몇 점, 국수사리 조금, 우려낸 국물에 파를 넣고 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음식이라 뭔가 씹는 느낌의 재료가 적다. 그 허전함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깍두기다. 큼직한 무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면 설렁탕의 어딘지 모를 서운함을 채워준다. 그래서 설렁탕엔 배추김치보다 깍두기가 제격이다. 또 중간쯤에 깍두기 국물을 설렁탕에 넣어서 먹으면 맛이 단백해지고 개운해진다.
무는 배추, 고추, 마늘과 함께 한국인이 즐겨먹는 4대 채소중 하나이다. 한반도에서 무를 재배한 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다. 소금에 무를 절인 음식은 일본이나 중국에도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젓갈과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인 깍두기는 한국인이 만든 것이다. 배추가 김치의 주역으로 본격화되는 20세기 이전에는 무를 주로 먹었다.
이 깍두기는 언제부터 먹은 것일까? 깍두기는 조선요리제법’(1917년 판)에 처음 나온다. 1924년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다양한 깍두기에 대한 조리법이 나온다. 그렇다면 대략 그 이전에 먹은 것이 확실하다.
깍두기는 전통 서울음식이다. 요즘에는 전국적으로 깍두기를 많이 담가 먹는데, 불과 20년 전만 해도 지방에서 깍두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총각김치라든지 다른 무김치는 있었지만 이 깍두기 모양의 김치는 서울, 경기 지역에만 유행했던 음식이다.
무의 품종 중에는 서울무가 있다. 서울무는 상당히 길쭉하고 튼실했고, 아삭한 식감과 시원한 단맛이 강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서울에서 무는 동대문 밖의 밭과 한강변에서 많이 재배하였다. 특히 뚝섬에서 무재배가 흔했고 무가 맛있기로 유명했다. 한강변에 물이 흐르면서 모래흙이 퇴적되어 모래밭이 형성이 되었는데, 이 모래밭에는 다른 작물은 키우기 어려웠지만 무는 모래밭에서 쑥쑥 아래로 내려가는 힘이 좋아서 재배하기가 수월했다.
깍두기는 사시사철 무만 있으면 담글 수 있었기에 집에서도 언제나 먹는 음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식의 빼놓을 수 없는 반찬이었다. 특히 1920년 서울에 24개에 불과하던 설렁탕집이 몇 년 만에 100여개로 폭증하면서 매콤하고 달달한 서울식 깍두기는 외식반찬의 주역이 되었다. 1945년 처음 문을 연 부산남포동의 유명한 설렁탕집 이름도 서울깍두기이다.
서울은 조선시대에도 수도였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사대문이 열리면서 지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6.25전쟁 이후 더 사람들이 모였고, 1960-80년대를 거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거의 노동자였다. 하루에 한 두끼니는 밖에서 해결해야 했던 가난한 노동자들은 가능하면 저렴하고 간편한 음식을 먹으려 했고 국밥이 대표음식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국밥에 어울리는 반찬은 단연 깍두기였다.
젓갈의 감칠맛과 소금의 짠맛, 고춧가루의 매운맛과 설탕의 단맛이 적절하게 석인 깍두기의 조화로운 맛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한국인의 맛이다.
임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