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전쟁의 악영향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뉴 차르(the new Tsar)를 꿈꾸는 푸틴에 대한 비난의 파고와 함께 며칠 새 휘발유 값은 2천 원을 출렁인다. 멀리 동유럽의 전장터는 이미 우리 생활 가까이에 다가온 것이다. 촌분을 다투어 경쟁하듯 올라오는 유튜브 영상은 전황의 시시각각을 중계한다. 이른바 게임 속 시뮬레이션처럼 손바닥 속 전쟁을 연출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진격과 반격의 와중에서 점점 수렁에 빠지고 있다. 러시아 군대는 예상보다 더디게 키이우(키예프)로 향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군대는 기대보다 잘 버틴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저러나 무너지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쌓아 올린 공든 탑이고, 이리로 저리로 흩어지는 것은 국민의 억하심정이다. 당사자인 두 대통령 푸틴과 젤렌스키는 회담을 반복하지만 결국 시늉에 그친 채 끝까지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 세계가 베팅하듯 제 몫을 걸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1990년대 이전,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맞대결을 보는 듯하지만, 당시 둘 사이의 대등한 파괴력은 언제나 타협과 중재로 끝을 맺었다. 누구도 제3차 세계대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실을 보면 러시아의 힘은 옛 소련과 비교할 수 없다. 당장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모습이 악당의 화풀이처럼 보이는 이유다. 미국과 유럽은 금융제재나, 수입금지로도 손쉽게 러시아의 발목을 묶을 수 있다.
사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한바탕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반목과 대립을 하기에는 서로 공통분모가 너무 많다. 서로를 포함하는 교집합의 대표성은 비교불가한 정교회 신앙이다. 현재 러시아정교회는 1589년 러시아에 총대주교 관구가 설립되면서 시작하였다. 물론 출발점은 988년 키예프공국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리스정교회를 통해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한다.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은 망했으나, 모스크바 대공국과 함께 슬라브인들의 신앙 전통은 이어졌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천년이 넘도록 우크라이나인든, 러시아인이든 슬라브인들의 삶과 분리될 수 없었다. 슬라브 사도들에 의해 동방정교회가 전파된 이래 러시아인의 세계관에는 언제나 정교회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은 먼저 상류층의 관심을 끌었고, 곧이어 러시아 민중의 삶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양파형 돔 교회 양식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랜드마크이다.
한국정교회가 발표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정교회의 태도’에 따르면 불과 몇 년 전,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는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키이우 교회를 어머니 교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인들은 어머니 교회를 향해 미사일을 쏘고, 신앙의 형제자매를 향해 탱크를 들이대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정교회성직자들의 전쟁 축복으로 많은 우크라이나 성당들이 파괴되었고, 우크라이나정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감스럽게도 두 나라 민중의 삶을 지탱해온 정교회 신앙은 전쟁을 막지 못하였다. 신앙이 국가주의적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시절 대박해 이래 러시아정교회는 가장 신실한 신자를 국가 지도자로 두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정교회의 수호자와 같은 존재로 군림한다. 따라서 러시아정교회는 민족주의적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찬성하였는데, 지난 2월 23일, 끼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 무명용사 묘지에서 ‘모든 군인은 국가가 필요로 하면 나가 싸워야 한다’고 연설한 배경이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 바로 하루 전날 일이었다.
러시아정교회가 보여준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 대한 태도는 신앙이 국가이념의 포로가 되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한국정교회 안토니오스 임종훈 신부는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는 종교인이었더라면, 애초에 이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을 거고, 계속 진행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느 종교인이든 진정으로 종교적 삶을 산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개인적 삶에, 싸움이라든가, 전쟁이라든가, 하는 것은 끌어들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답해한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아르메니아사도교회의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는 ‘겟세마네 십자가’로 불린다. 무거운 가시관을 머리에 쓴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고, 그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마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눅 13:34) 부르듯, “우크라이나(국가) 우크라이나(정교회)”를 외치며 탄식하시는 듯하다. 눈앞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그들의 천년신앙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