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veau d'or’ 금송아지의 노래
우리 교회는 2022년 한 해 동안 ‘말씀 속을 걷다’라는 제목으로 새벽 성경 통독 기도회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비록 일주일에 두 번 맡고 있지만, 새벽 현장 예배뿐만 아니라 유튜브로 송출되는 영상을 미리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20분이 훌쩍 넘는 분량의 성경 본문을 두 번 봉독하고 말씀을 나누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문제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프로 성악가는 아니지만 과거의 구습 때문인지 성할 날이 없는 목 상태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보호하려면 말을 적게 해야 하는 게 상책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과묵한 사람이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성악가들은 그 날의 노래 컨디션에 따라 세상을 다 소유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부류들입니다.
그래도 매일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더욱 크기에 감사하기만 합니다. 마음대로 취사선택함 없이 통독의 순서에 따라 성경 본문이 정해지는데 어쩌면 그렇게 때에 따른 귀한 말씀을 주시는지, 말씀을 통해 만나 주시는 그 섭리가 참으로 오묘합니다. 또한, 목사로서 설교를 준비한답시고 짧은 분량의 성경을 해부하듯 읽곤 하는데 무언가를 해부한다는 것은 이미 생명의 관계를 떠난 것이듯 같은 성경을 읽어도 통독을 하며 거시적으로 읽는 것과 설교를 위해 미시적으로 읽는 것은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함께 하는 성경 통독의 즐거움은 상상이상이었습니다.
큐티처럼 홀로 짧은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것도 좋지만 어느 정도 부담스러운 분량을 함께 봉독하며 읽을 때 성경 말씀이 더욱 생명력 있게 다가올 수 있음을 깨달으며 경전을 대하는 유대인들과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새삼 느낍니다.
오늘 새벽 제가 맡은 본문은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 사사기 17~21장 말씀이었는데 새롭게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사사기 마지막 다섯 장에는 사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시기의 결론 부분에 사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메시지였습니다. 사사는 재판관(Judge, Richter)을 의미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사사가 등장하지 않고 인간군상의 온갖 혼란상이 기록된 것은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참된 사사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한 구절 말씀으로 사사기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사사기 21장 25절 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그 때가 왕정 시대 이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사기 17장에서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서 시작한 우상숭배가 18장에서 단 지파로 퍼졌고 19장에서는 그 영향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으로 번졌으며 20장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분열하여 서로 죽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21장 마지막에 이르러 그와 같은 결론이 맺히게 되었습니다.
어제 새벽, 20대 대선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선거의 결과를 떠나서 한 결 같이 하는 말은 이번 대선이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그 소견을 관철시키려 비방과 음해와 분열과 선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정책의 대결이 아니라 후보들 사생활에 관한 천박한 내용들이 주된 이슈가 되었고 기자들은 부채질을 하였으며 사람들은 그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마구 들썩였습니다. 평화통일을 외치는 것만큼이나 아득한 이야기 같지만, 이런 선거는 또다시 없기를 바랍니다.
사사기 19장에는 어떤 레위 사람과 그의 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는 일들이 약속의 거룩한 백성들에게서 일어납니다. 결국 민족은 분열되었고 전쟁이 일어나 서로를 죽이기에까지 이릅니다. 동족간의 잔인한 살육 뒤에 한 지파가 멸절되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하나님께 울며 부르짖고 전쟁을 그칩니다.
이번 대선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실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 휘말린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한국 교회에게 이번 대선은 상처밖에 남지 않은 선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국교회의 선한 영향력과 입지는 더욱 급속하게 줄어들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사사기 마지막 이야기의 시작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사기 17장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서 시작한 우상숭배였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여호와 하나님께 은을 거룩히 드린답시고 그 은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일들은 우리 가운데 이미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질 숭배는 더 이상 말할 것조차 없고 레위인 제사장을 돈을 주고 고용한 미가처럼 목회자를 CEO나 피고용인으로 교회의 부품으로 여기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가의 집에서 더 좋은 조건의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이직(?)한 레위인 처럼 물질을 쫓아 목회 자리를 교환하고 사고팔며 세습하는 목회자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에 대한 신성한 책임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꽃 중의 꽃 대통령 선거가 이토록 천박한 역대급 비호감 선거가 되어버린 것은 교회와 우리 모두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정화와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성소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한 가족의 우상숭배와 물질숭배가 사사기 마지막 결론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번 대선을 보니 정치가 종교와 같이 되었고 종교는 정치의 하위 개념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정치판에 휩쓸려서 우상숭배와 자기 소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말고 말씀을 통해 때에 따라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중심에 모시는 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이번 20대 대선 전체를 바라보며 한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래가 있습니다. 2막 3장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전장에 나가기 전 술과 노래로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 마가레테의 오빠 발렌틴을 희롱합니다. 아니, 오늘도 굳건히 서서 거룩한 백성의 품격을 잃을 채로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 버리고 그 자리에 물질과 자기소견의 우상을 세워 놓고선 그것을 숭배하며 일희일비하는 인간들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금 송아지는 항상 굳건히 서 있다네!
사람들은 경배하네 그의 힘을,
사람들은 경배하네 그의 힘을,
세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흉악한 우상을 찬양하기 위해,
왕과 백성들이 마구 뒤섞여,
짤랑거리는 돈의 타락한 소리에 맞추어
광란의 윤무를 추고 있네,
우상의 발등상 아래에서!
사탄이 이끌고 있다네, 그 춤판을!
더 이상 이 나라 백성들 가운데 이와 같은 노래가 아니라 울려 퍼지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온 세상에 맑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거룩한 노래를 퍼트려야 할 책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새로운 대통령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리더를 사용하셔서 이 나라를 축복해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인간이 인간의 참된 사사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대통령이 정해졌습니다. 민주주의는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도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들뜬 마음과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신 곳으로 얼른 돌아가 그곳을 중심을 다시 함께 모여야겠습니다.
https://youtu.be/x66TYd9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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