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빛, 칸딘스키와 프로코피에프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을 방문했습니다. 노원 구민회관에서 신속 항원 검사를 받고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 길거리의 포스터를 보고는 마실 나가는 마음으로 들렀습니다. ‘빛’이란 주제로 영국 테이트 미술관의 작품들을 전시한 특별전이었는데 계획에 없던 방문이라 저희 부부는 동네사람답게 편한 운동복 위에 겨울 점퍼를 입은 채로 입장했습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처음 눈에 들어온 작품을 본 순간, 그제야 저와 저의 복장이 처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밀 만 한 옷자락도 없는 복장임을 깨닫고는 뭐라도 해야겠는지 저도 모르게 두 손이 공손하게 모아졌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의 심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민망함이라는 감정의 수치만을 놓고 볼 때에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신비로운 영감으로 성서의 이야기를 많이 그렸던, 평소에 흠모해 마지않았던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작품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블레이크의 그림에는 신성한 빛이 담겨있었습니다. 동네에서 우연히, 그것도 그런 차림으로 그의 작품을 만나게 될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과의 우연한 조우만큼 멋지고도 기억에 오래 남는 일도 또 없을 것입니다. 2004년 결혼 직후 독일에서 홀로 지낼 때, 당시 국내 기업에서 일하던 아내가 네덜란드에 출장을 나왔습니다. 제가 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아내를 만나서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습니다. 비가 왔었던 것 같습니다. 우연한 길에서 그리 커 보이지 않은 미술관이 있기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이었고 그 유명한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걸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후 그 그림이나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가 거론될 때마다 저는 그 그림의 진본을 아름답고 우연한 추억 속에서 직접 보았노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년 가까이의 세월이 흘렀고 결혼 하자마자 생이별을 해야 했던 헤이그의 애틋한 신혼부부는 어느덧 동네의 생활인 부부가 되어 데자뷔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만이 아니었습니다. 작품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서양미술사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윌리엄 터너, 까미유 피사로, 끌로드 모네, 존 컨스터블의 그림들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놀라움과 감탄과 경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두 번이나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와 본 작품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돌리자마자 다시 보고 싶어졌고 평생 이 그림을 또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연거푸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칸딘스키의 ‘스윙(Swinging)’이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렸던 1925년에 칸딘스키는 상당기간 동안 독일 뮌헨과 바이마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우켈른(schaukeln)’이라는 독일어 제목으로 불려야 마땅하며 그래야 이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 실익을 챙기는 데에 능하지요. 부드러운 포물선 운동을 연상 시키는 ‘스윙’과 달리 ‘샤우켈른’은 기계적이면서도 자율적이고 반복적이면서도 다채로운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스윙’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따로 있으므로(schwingen) 이런 경우에는 독일어 제목을 알아야 그림과 더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베토벤이 그의 네 번째 교향곡에 ‘전원’이라는 제목을 붙인 적이 없듯이 때로는 예술 작품에 붙여진 이름이 참된 만남에 방해가 되곤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림은 그 자체로 보는 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림은 원작을 직접 봐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화보집이나 모니터로는 느낄 수 없는 칸딘스키의 붓 터치가 느껴졌고 다채로운 색들은 이미 살아 있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예술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감격이 몰려왔습니다.

한참 보고 있을 때 그림 속 도형들이 숲 속에 숨어 있는 요정들처럼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샤우켈른’이었습니다! ‘요놈들!’ 하고 벼르듯 쳐다보니 이내 그림 속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옵니다. 모차르트 같은데 보다 자유롭고 보다 모던한 느낌의 천재성이 깃들어진 음악이 들릴 듯 말 듯 하며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두 번째로 다시 돌아 왔을 때 저는 이미 오감으로 그 음악을 흥얼거리며 그 그림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한 편의 1차원 그림 속에 움직임과 음악과 빛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음악은 프로코피에프의 교향곡 1번 1악장이었습니다. 이 음악과 프로코피에프 그리고 지휘자 첼리비다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지나치게 설명되어진 느낌은 오히려 그 전달을 가로막을 수 있기에 음악을 소개 하는 것으로 글을 마칠까합니다. 다만, 코로나로 인해 여행 다운 여행을 다니지 못하고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 한 이 시대에 영국에 가서나 만날 수 있는 명작들을 가까운 곳에서 직접 만날 수 있고, 모처럼 빛과 색채와 위대한 영감으로 마음 깊은 곳 까지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이번 전시회에 꼭 가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소개글로 인하여 이미 여러분들의 또 다른 우연적 만남을 망쳐버린 것 같아 죄송하지만 평생 다시 못 올수도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리고 칸딘스키와의 놀라운 만남을 고대하며 이어폰과 프로코피에프 교향곡 1번을 꼭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OFmMy-xC3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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