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2018)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영화의 주인공 라짜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다시 살려내신 나사로의 이탈리아식 발음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나사로에 관한 것이며, 실제로 영화 속에는 성경의 나사로 모티프가 깊이 각인되어 나타난다. 《행복한 라짜로》는 형식상으로는 판타지영화를 닮았고, 내용상으로는 종교영화를 닮았다. 그리고 보는 즉시 몇몇 영화와 소설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소작농의 마을은 《웰컴 투 동막골》의 마을을 닮았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순박한 주인공 라짜로는 미하일 엔데의 소설 속 주인공 모모를 닮았으며, 각각 자기 아래쪽의 계급을 착취하는 세 계급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닮았다.
고립된 마을의 농민들은 현대사회에서 진작 소작제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후작 부인에게 속아 소작농으로 착취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 소작농들은 라짜로를 맘대로 함부로 부리면서 라짜로를 착취하고 있다. 하지만 맘씨 좋은 라짜로는 언제나 열심히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해낸다. 그는 착하고 온순한 사람, 꼭 날개 없는 천사 같은 사람이다. 영화는 라짜로의 정체도 라짜로의 근원도 설명하지 않는다. 마치 언제나 그 자리에 그냥 그렇게 있었던 사람처럼 라짜로는 그 자리에 말없이 있다.
잔잔한 영화는 요양을 위해 마을로 들어온 후작 부인과 그의 아들로 인해 다른 공기를 맞게 된다. 농부들을 향한 어머니의 속임수를 멸시하는 후작 부인의 아들은 라짜로와 우정을 쌓아가고,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아들의 행각은 마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때쯤 영화는 중반에 이르고, 이 중간 지점에서 정확히 봉준호의 《기생충》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영화로 탈바꿈한다. 공간은 시골에서 도시로 이어지고, 시간은 훌쩍 건너뛴다. 하지만 우리의 라짜로는 변함이 없다. 착취 역시 변함이 없다. 단지 주체와 방식만 바뀌었을 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영화는 종교적인 모티프를 여러 곳에서 발현시킨다. 그리고 그 발현 역시 영화의 중반을 기점으로 최고조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영화의 중간쯤, 동화처럼 들리는 늑대와 성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성자가 늙은 늑대를 찾아간 이야기. 늑대를 찾아 헤매다 눈밭에 쓰러진 성자를 잡아먹으려고 다가간 늑대는 순간 처음 맡는 냄새에 주춤거린다. 그리고 영화는 늑대가 성자를 잡아먹지 못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어.”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성자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를 떠올린다. 성 프란치스코는 제2의 그리스도라 불렸던 인물이었다. 영화 속의 라짜로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를, 그리고 동시에 그와 이어진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만든다. 성경은 대제사장들이 부활한 나사로를 끝내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고 전한다.(요 12:10) 주인으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종으로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의 주인공 라짜로 역시 비슷한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에는 종교인의 모습이 두 차례 등장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처음에 등장하는 신부는 후작 부인의 사기를 알았을 것이 틀림없음에도 그저 탈곡을 축복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오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수녀는 하나님께 바치는 음악을 듣겠다고 성당 안으로 들어온 가난한 자들을 성당 밖으로 쫒아낸다. 그러자 그 거룩한 음악은 성당 안에 사람들을 남겨둔 채 쫓겨난 사람들을 따라 성당 밖으로 나온다. 소위 마술적 리얼리즘의 순간이다.
《기생충》과 거의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행복한 라짜로》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마치 필름 같은 영화 화면의 테두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신화와 동화를 오가는 우화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행복한 라짜로》는 현실로 인해 다소 잔혹해보이지만 그래도 성스러움과 선한 인간을 간직한 아름다운 우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