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 반짝
성탄절은 한때 한국교회의 대표문화였다. 그런데 이제는 단 하루의 말뿐인 ‘메리 크리스마스!’로 전락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어릴 적 동네교회에서 경험한 성탄절 분위기를 고운 추억으로 지니고 있다. 동심으로 간직한 사연들은 세월이 흘렀어도 해마다 성탄절기가 다가오면 마치 오색 전등처럼 그리움으로 ‘반짝반짝’ 빛나게 마련이다.
성탄 장식은 세계교회와 많은 나라가 공유하는 가장 따듯한 아이콘이다. 세계의 구유상(Krippe)들은 자신의 고유한 문화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한다. 겨울이 없는 사막에서는 야자수 아래 태어난 아기를, 에스키모인들은 얼음집과 함께 그리스도를 환영한다. 민족의 숫자만큼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성탄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대림절 헤른 후터의 별은 그의 영지를 난민들에게 나누어준 진첸도르프 공동체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주님의 보호하심’(Herrn Huter)을 찾아 온 이들이었다. 마치 별이 희망으로 이끌어 주듯, 은총을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잡이별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듯 구유, 별, 등불, 천사와 같은 성탄 장식은 아련하고 따듯하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행여 믿음을 등진 사람들도 그런 흐믓한 기억 때문에 다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성탄을 앞두고 4주간 동안 대림절은 전통과 문화 그리고 가난한 마음을 재현하는 절기이다. 13세기 지혜자인 야고보 드보라진은 이렇게 말하였다. “대림절은 4주 동안 거행됩니다. 주님의 오심이 4중으로 이루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고, 자비로움으로 오셨고, 죽음을 통해 오셨고, 마지막 심판 날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대림절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절기이다. 한국교회의 인기 찬양이 된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감싸여’(Siegfried Fietz 곡)는 그가 쓴 시로 유명하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20세기 예언자 본회퍼 목사는 가장 깊은 어둠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아픔과 비참의 현실 속에서 어둠과 빛의 갈림길을 일깨워 주었다.
1943년 말경, 불의한 히틀러에 저항한 이유로 사형을 앞두고 나치의 감옥에 갇혀 있던 본회퍼는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던 대림 절기였다. “감옥에서 독방생활은 대림절에 관한 많은 것을 나에게 되새겨주고 있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고 희망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한다. 왜냐하면, 문이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 목사는 ‘인간의 오만함으로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문은 닫혀있고 이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성탄은 별빛같은 동화에 머물지 않는다. 그 상징성은 오늘의 현실과 현장을 고단하게 증언한다. ‘성육신’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은 잠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홀연 낮은 자리로 찾아와 연기하신 연출된 드라마가 아니다. 신성을 버리고, 존엄과 권위와 특권을 포기하신 사건이었다. 그러기에 거룩한 탄생은 종의 삶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는 절기이다.
오늘의 교회는 상징의 힘을 잃어버렸다. 온갖 이미지, 그림, 환상, 이야기 등 거룩한 상상력을 상실한 까닭에 너무 일찍 꿈 항아리를 깨뜨려 버렸다. 성육신의 위대한 위험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아픔, 두려움, 고달픔, 위기에 대해 더 이상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가난하고 외롭고 낮은 자리를 외면하고, 높고 화려하고 부유함을 찬미하는 배경이다.
대림절은 비록 춥고, 어둡고, 을씨년하지만, 온통 따듯한 상징투성이로 채워 나가는 절기이다. 성탄이 중요한 것은 번쩍한 화려함이 아니다. 고난의 자리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가난한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으로 함께 하셨다. “가장 가치있는 것들은 대개 고난이라는 포장지로 싸여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대림절의 기다림은 ‘반짝반짝’ 하나님의 역사를 고대하며 그리워하는, 시간 너머의 기회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