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에서 드리는 감사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교회는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신앙공동체이다. ‘환대’의 전통은 뿌리 깊은 신앙의 유산이다. 히브리서는 손님 대접을 강조한다(히 13:2). 여기에서 손님은 집을 떠난 나그네요, 박해로 고향을 잃은 피난민이다. 베드로전서는 당시 그리스도인 자신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벧전 1:1),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벧전 2:11)라고 말하였다. 당면한 실존적인 문제였다.
구약의 법에서 나그네는 제3자가 아니며, 공동체 안에 ‘이방인, 나그네, 고아, 과부’를 포함한다. 칠칠절에 제사장은 새로 수확한 밀로 누룩을 넣어 만든 떡을 하나님께 바친다. 거룩한 곡식예물로서 ‘두 개의 떡’을 드리는 것이다. 해마다 유대인은 메길롯 전통에 따라 칠칠절이면 룻기를 읽는데, 이방여성의 나그네 삶을 잊지 않고, 한 식구가 된 사건을 역사 속에 보존한 셈이다. 칠칠절에 드리는 두 개의 떡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한다.
이주민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뿌리 뽑힌 사람이지만, 그런 실존적 처지 때문에 자기시대에서 가장 진취적인 사람이 된다. 우리 민족의 경우에도 19세기 중반부터 수많은 나그네가 되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았다. 가난과 식민을 피해 만주, 연해주, 하와이와 멕시코, 일본으로 유랑민처럼 조국을 떠났다. 1차적으로 경제적인 문제였다.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쌀과 같다”고도 하였다. 해방과 독립을 맞았지만 경제적 이유로 다시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60, 70년대는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농업노동자로 남미에, 더 나은 풍요를 꿈꾸며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서 자리 잡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디아스포라로 산다는 것은 깨어지지 않는 유리벽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르트르는 “이주민이 되기보다는 비참한 원주민이 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누구든 자기 고향과 조국을 떠나는 것은 가장 큰 실연의 아픔이고, 지독한 상실이다.
한 동안 독일 한인동포 1세대 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있다. 루르 탄광지대 중심인 복흠한인교회였다. 교인 중에 이민으로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광부와 간호사로 왔다가 남았다. 그들에게는 가난을 면할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으나, 당시 내 나라에는 설자리가 없었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독일까지 모험을 한 셈이다.
광부와 간호사의 첫 한인목사(1964-1969년)로서 일했던 개척자는 고 이영빈 목사(1926-2018)이다. 그는 1955년 유학한 이래 평생 독일에서 목회자로서 살았다. 그는 소천하기 1년 전 ‘감사의 문서’(Mein Dankes Wort)를 작성하여 네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남겼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나중에 독일 대통령이 된 구스타프 하이네만 변호사이다.
어느 날 아침 20명의 한인 광부들이 이 목사를 찾아왔다. 독일에 온 지 10개월 밖에 안 된 그들은 일주일 간 몸이 아파 출근하지 못했다고, 또 자주 부상당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와 3년 마다 광부를 교체하는 ‘로테이션 계약’을 맺은 만네스만 광산회사는 계약서에도 불구하고 한국대사관 노무과의 묵인 아래 해고를 일삼았던 것이다. 독일노동법을 위배한 일이었다. 광산주의 갑질과 비인권적인 행위로부터 한인광부들의 권리를 지켜준 것은 구스타브 하이네만 변호사와 뒤셀도르프에 있던 그의 법률사무소였다.
이영빈 목사의 ‘감사의 문서’는 독일 광부와 간호사들을 대신한 것이었다. 나는 ‘난민’(Asyl)이란 말에 경제적 의미가 담겨있음을 독일에서 배웠다. 바로 초창기 법적 보호로부터 배제된 한인들의 처지는 난민과 다름없었다.
복음서는 첫 머리에서 아기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신한 난민가족임을 증언한다. 나그네는 약속하고 찾아 온 사람이 아니다. 그냥 떠돌이일 뿐이다. 인도말로 ‘손님’의 뜻은 ‘약속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나그네는 환대받을 권리가 있는 손님이며, 그 땅의 주인의 친절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땅 끝에서 드릴 그들의 감사기도 속에 포함되어야 할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