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며칠 전 아랫집 권사님의 전화가 왔다. 이웃에 사시는 분이 김장을 하셨는데 내 몫도 챙겨주셨다는 것이다. 권사님 댁에 갔더니 김장 김치를 담은 비닐 한봉을 내주셨다. 눈으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김장 김치가 군침을 돌게 했다. 그것을 받아 집으로 와서 얼른 밥을 했다. 압력솥이 치카치카 하는 동안 봉지에서 김치 한 덩어리를 꺼내어 그릇에 담았다. 매콤한 양념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얼른 밥을 떠서 한조각 찢은 김치를 올려 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밥은 아직 치카치카 중! 뜸이 들기 무섭게 밥을 펐다. 그리고 김치를 죽죽 찢은 다음 양념소인 무채와 함께 입안으로 넣었다. 김치가 달았다. 밥 한그릇 뚝딱하였다. 김장을 하는 날에는 다른 반찬은 필요없다. 그저 하얀 쌀밥과 김치면 충분하다. 입술이 얼얼할 정도로 먹다 보면 어느새 포만감이 밀려와 그제야 숟가락을 놓게 된다. 김치를 즐겨 먹지 않은 탓에 냉장고 한 칸은 김치 여러 종류가 잔뜩 보관되어 있지만 이렇게 겨울을 준비하는 음식인 첫 김장김치는 밥 한 공기 먹어주는 것이 김장에 대한 나름의 예의다.
김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번에는 고추장 이야기도 남겨보자. 이곳에 내려와 고추장을 담궈 먹고 있다. 된장과 간장도 담그고 싶지만 이렇게 저렇게 얻은 된장이 유리병마다 여러개 있어서 된장은 그것으로 족하였다. 대신 된장보다 많이 먹는 고추장은 누구에게 얻어 먹더라도 금새 동이 났기 때문에 한번 담궈 먹고 난 뒤부터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매해는 아니더라도 고추장이 줄어들 즈음에 한번씩 담궈 먹는다. 지난달 10월 초에 냉장고에 저장해 놓은 고추장용 고춧가루가 계속 나의 눈을 끌었다. 얼른 고추장을 담그라는 유혹의 손길이었다. 그래서 대체 휴일인 개천절에 드디어 큰 일을 저질렀다. 엿기름을 내고 찹쌀가루를 넣어 삭힌 뒤 조려내는 과정을 여러 시간 한 뒤 메주가루와 조청과 고춧가루를 넣고 섞었다. 처음 했던 해보다는 맛이 덜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시중에서 파는 달달한 고추장보다는 낫다고 여긴다. 힘껏 저어가며 농도를 맞추다보니 거의 4리터 정도의 고추장이 완성된 것 같다. 찹쌀 고추장으로 한 항아리, 육포를 얻었는데 잘 먹지 않아 육포 고추장을 만들어 작은 단지에 담았다. 그리고 매실청이 넘쳐나서 매실청을 듬쁙 넣은 매실 고추장 한 항아리도 만들었다. 크든 작든 어찌됐든 항아리 3개에 각각 다른 고추장을 담고는 햇살 좋은 곳에 두고 익히고 있는 중이다. 말은 서너 개월 후에 먹으면 된다지만 여차하면 뚜껑을 열어 먹을 기세다. 지난번 그 중에 하나인 매실고추장 항아리를 열어 맛을 보았는데, 음~~~ 매실향과 맛이 기가 막히다. 자화자찬일 수 있겠으나 내 입에 맛있으면 되지 않을까. 고추장도 겨울을 앞두고 먹는 요긴한 반찬이다.
어제는 이웃집에서 연락이 왔다. 블루베리 묘목과 무를 가지고 가라는 신호였다. 매년 그 분에게 많은 먹거리 신세를 진다. 나보다 일년 먼저 귀촌을 하신 분인데 농사를 엄청 잘 지으신다. 해마다 각종 채소도 주시고 과수도 챙겨주신다. 위에 적은 김장김치도 그분의 나눔이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무, 배추, 갓, 쪽파 등 김장꺼리를 무상으로 챙겨주신다. 혼자 사는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느냐마는 그래도 그분 덕분에 겨울 동치미도 담궈 먹고 잘 보관한 무는 겨우내 반찬으로 밥상에 올린다. 농사용 수레를 가지고 갔더니 거기에 가득 손질한 무를 담아주셨다. 지금이야 넘치는 반찬으로 동치미도 사다 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김장김치에 동치미도 늘 곁들인 김치였다. 그러면 겨울 내내 시원한 동치미는 여러 방면에 쓰임을 받았다. 찐고구마와 함께 먹고, 냉면 육수로 먹고, 밥맛 없을 때 무를 조각내어 오독오독 씹어먹고, 간혹 연탄가스를 맡고 난 뒤에 시원한 동치미 한사발 들이켜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도 했다. 무를 다듬으며 동치미 담그는 비법을 알려주셨다. 남아도는 항아리도 많으니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이번에는 동치미, 짠지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바야흐로 깊은 가을로 걸어가고 있다. 지난 월요일에는 큰맘 먹고 저 아랫지방 순창을 다녀왔다. 내려가는 고속도로에서 단풍 든 가을을 구경하고, 순창에서는 지인 덕에 용궐산과 만일산과 구담마을과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 집을 다녀왔다. 섬진강은 이름만 들어봤지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섬진강 하류부터 상류까지 굽이진 도로를 거쳐 그곳에 내려앉은 가을을 실컷 구경하고 카메라에 한껏 담아왔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세월도 흐르니 사진 속의 인물도 어느덧 세월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어떠랴! 아름다운 자연 속에 나도 하나의 자연으로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족함이 마땅하지 않으랴!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