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을은 오고 가는구나.
시월 중순이 시작될 무렵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서 가을을 지나 겨울로 지나가는 것으로 여겼다. 차가운 기온으로 가을 향기가 멀리 달아날 것이라 예상하고 애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데, 엊그제 강원도 삼척에 일이 있어 영동고속도로를 탔는데 역시 강원도의 힘이란! 내가 사는 충북과는 달리 골이 깊은 산들마다 하늘로부터 가을이 타고 내려오는 것이 눈에 환했다. 하늘로 뻗은 나무들이 색색이 고운 옷들로 갈아입으면서 산은 그야말로 가을임을 뽐내고 있었다. 탄성을 연신 발하며 지난 몇 주간 가을 없이 지낼 것이라는 우울한 생각들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이제 내가 사는 곳도 조금 있으면 하나 둘 고운 옷들을 갈아입을 것이니 좀 늦긴 했어도 가을의 정취를 마주할 수 있어 고마운 일이다.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친 뒤 함께 벼농사를 짓는 공동체 식구들과 벼를 수확했다. 바짝 마른 노란 벼이삭이 콤바인이 지나갈 때마다 찰찰찰 소리를 내며 빨려들어갔다. 빨려 들어간 벼는 낟알은 자루로 짚들은 잘게 잘려지면서 다시 논으로 쏟아냈다. 잘게 썬 짚들은 화약비료를 쓰지 않는 논에 유일하게 주는 거름인 셈이다. 겨우내 찬바람과 눈에 얼다 녹다를 반복하다 따뜻한 봄날에 경운을 하면서 논 깊숙이 거름으로 그 해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덕분에 미꾸라지와 메뚜기, 개구리, 물방개, 우렁이 등 논에 서식하는 생물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함께 벼수확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일 것이고 녀석들에게 있어선 천지개벽과 같은 쪼개짐일 것이다. 비록 처서 이후 몇 주 내내 비가 와서 이삭이 잘 여물까 염려를 하였지만, 예년에 비해 큰 태풍없이 지나간 해였기에 염려에 비해선 오히려 더 많이 수확이 되었다. 올해는 목사님네 자녀들 셋도 함께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모두 초등학생이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위로 둘은 고등학생이고, 막내는 중학생이 되어 농사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모두 덩치들이 있어 힘에 부치는 볏단 나르는 것과 쌀자루를 옮기는 것은 그들의 몫이 되어 덕분에 난 처음으로 힘을 쓰지 않는 벼수확이었다. 역시 농사는 힘쓰는 남정네나 함께 하는 것이 힘이 나는 것이니 그들의 참여가 참 고마웠다. 안그랬으면 밤새 아이구 허리야를 노래 불렀을 터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 콤바인이 지나가고 난 자리는 가을이 깊숙이 내려와 앉을 준비가 되었다.
들깨를 베고 팥을 거둔 밭을 정리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트랙터로 땅을 갈아주려고 했다. 땅이 질어서 그런지 비닐 걷기가 쉽지 않았다. 물을 먹은 흙은 무겁기 그지 없었고, 얇은 비닐은 걷는 내내 중간에서 뚝뚝 끊어졌다. 호흡을 길게 하고 참을 인을 서너번 되새기며 찬찬히 비닐들을 걷어냈다. 옆에서는 고양이들 몇이 나의 손놀림에 장단을 맞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고 있었다. 비닐을 다 걷어낸 다음에는 고추 지지대를 정리했다. 벌써 수 년 전에 걷어놓고 정리하지 못했던 지지대를 이제야 정리를 하는 것이다. 내 키를 훌쩍 넘는 지지대는 알루미늄과 쇠로 되어 있어 무게가 꽤 나갔다. 가벼운 알루미늄과 무거운 쇠를 분류하여 옮기기를 몇 번 하고 나니 이 또한 버거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힘에 부쳐도 참고 어둠이 짙게 내려올 때까지 움직였다. 짙은 어둠으로 사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즈음 작업을 멈추었다. 한참 옆에서 놀던 냥이들은 어느새 주인을 팽개치고 보금자리로 돌아가 저녁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교 만점이면서도 얌체들이다.
이렇게 밭을 정리하는 공을 들였는데, 하필 이럴 때 또 트랙터가 말썽이란다. 연식이 오래된 트랙터라 시동을 걸 때마다 고생을 하는데 이번에는 로타리가 굴러가지 않고 전진을 할 때마다 통통 튀는 현상으로 트랙터가 앞으로 튕겨나가는 듯해 불안하다는 것이다. 마늘 밭을 만들어야 하는 때에 트랙터가 도와주지 않는다. 이렇게 농기계가 말썽을 부리면 농사 할 맛이 뚝 떨어진다. 아직 걷지도 않은 콩이 있는데 벌써 마음은 내년에는 어떻게 농사를 지을 지부터 걱정이 앞선다. 작은 텃밭이면 호미와 삽과 괭이로 어느 정도 힘을 들일 수 있는데 거의 천여 평의 땅이라면 수작업, 수공예는 어림없는 일이다. 게다가 혼자이지 않은가. 내일 걱정은 내일 해도 될 터이지만, 너른 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일도 아닌 내년 걱정도 오늘 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지면 밭들이 하나씩 정리가 된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비닐을 걷고 땅을 갈고 다시 비닐을 덮어 마늘과 양파를 심고 있다. 반면 게으른 농부는 그렇게 끌끌 차기만 하다가 겨울을 맞을 수 있다. 나도 올해는 게으른 농부가 되지 않으려고 봄부터 꽤 애를 썼으나 가을 막바지에 막판 뒤집기가 될 판이다. 트랙터, 그것이 무엇이라고 나의 마음을 이리 긁는다냐! 내 마음이 흔들린들 그래도 가을은 깊어가고 있다.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