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1951)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을 때 어느 수업에선가 지도교수님이 베르나노스의 책을 인용하신 적이 있었다. 바울과 관련된 수업이었는지 복음서 관련 수업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그때 베르나노스에 대해 처음 들었고 그의 책에 대해서도 처음 들었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수업 중 인용하신 책의 마지막 문장은 수업의 내용과 적절히 어울리며 매우 인상 깊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교수님의 입을 통해 독일어로 들은 그 마지막 구절은 이것이었다. “모든 것이 은혜다.”(Alles ist Gnade.)
이렇게 끝나는 소설이라니, 집으로 돌아와 저자와 책을 찾았다. 그 책은 1936년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쓴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라는 책이었다.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노스는 알베르 카뮈에 버금가는 실존주의자였다고 한다. 카뮈가 무신론 쪽에 선 실존주의자라면 베르나노스는 유신론 쪽에 서 있는 실존주의자였다고 한다. 한참 나중에 우리말 번역서를 구했을 때 당연히 먼저 책의 맨 마지막 부분을 들춰보았다. 수업시간에 들은 저 말이 우리말 소설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어 있을까? 그렇게 소설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말을 찾다가 수업시간에 들었던 문장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 신부의 마지막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설렘과 기대로 마침내 찾아낸 신부의 마지막 말은 우리말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는 1951년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우리말 영화 제목은 소설의 ‘신부’를 ‘사제’로 바꾸어 달았지만 어디까지나 번역의 차이일 뿐 소설과 영화의 원제목은 서로 동일하다. 작은 시골로 부임한 젊은 신부는 마을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아웃사이더다. 성직자로서의 자신의 무능에 대한 비관과 날로 쇠약해져가는 육체 속에서 신부는 용기와 힘을 얻기 위해 일기를 써내려간다. 지극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짧은 사목, 그 가운데 써내려간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찬 젊은 신부의 일기는 그 일기를 함께 보고 있는 나 자신의 나태함과 속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놀랍게도 영화를 볼 때에도 책으로부터 받았던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는 책의 언어를 답습하거나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영화 언어로 아름답게 변화시킨 감독의 역량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큰일을 위한 비전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듣고 배운 우리들에게, 병약하고 초라한 신부의 보잘 것 없는 목회와 회의로 가득 찬 깊은 고뇌는 생각지도 못 한 울림과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어느 시골의 젊은 신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여전히 지금도 나의 삶을, 나의 태도를,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책과 영화 모두를 접한 이후로 베르나노스의 책은 가장 자주 선물하는 책이 되었다. 특히나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거나 이미 그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물론 목회의 길이 아니더라도 피할 도리 없는 고민과 회의로 신앙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젊은 신부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난주 우연히 학창시절의 한 후배가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았다고 페이스북에 게시한 글을 보았다. 고맙게도 언제나 준 것 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주던 후배 역시 지금 사목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후배 덕분에 오래된 흑백영화와 책에 대한 추억에 젖어보고, 젊은 신부의 고민에 다시 한 번 어렴풋이 닿아본다.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안부와 주소를 묻고 또 한 번의 선물을 보냈다. 나는 이 책을 참 좋아하는구나 다시 한 번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