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의 때를 기다리며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기온은 물론 마을의 산을 바라보면 산자락부터 붉은 기운이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다. 가을이 내려앉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정말 무더웠던 여름이 갔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몇 주 후면 산과 들은 가을 향기로 만연할 것이다. 지난 월요일에 철원을 다녀왔는데 그곳은 벌써 논들이 누런 벼들로 가득했다. 어떤 논들은 이미 수확이 되었고, 아직 남아있는 논의 벼들도 조만간, 추석이 다가오기 전 추수가 이뤄질 것이라 본다. 빈들엔 학들이 내려와 떨어진 낟알을 주워먹고 있었다. 사람이 가까이가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 모습에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곳임을 느꼈다.
우리 논에도 지금 벼들이 한창 익어가고 있다. 올해는 우렁이가 예초를 매우 잘해서 피를 뽑는 고된 작업은 없었다. 벼마다 낟알들이 풍성하게 열렸다. 별다른 병충해도 없이 잘 자라주고 있었다. 추석 가까이 태풍이 몰려온다고 하는데 이 태풍만 잘 피해가면 올 벼농사도 풍년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수확을 앞두고 거센 비바람으로 논의 반 이상이 쑥대밭이 되어 쓰러진 벼들을 일으켜 세우느라 이 또한 엄청 고생했었다. 그러니 농사는 중간에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아니요 자만할 것도 아니다. 열매가 아무리 잘 열렸다고 해도, 맛이 참 좋다고 해도, 수확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끝났다고 할 수 없는 일이 농사인 것이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올 초는 농사 짓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간간히 내려주는 비와 강렬한 볕은 곡식이란 곡식이 자라고 익는데 무난해보였다. 겨우 두 이랑의 고추도 8월 중순, 처서 전까지는 주렁주렁 열리고 빨갛게 익어갔다. 고추 따는 재미가 가득했다. 소쿠리 하나 가득 따고 와서 깨끗이 닦고 뜨거운 태양 아래 널면 저절로 말라가는데 사나흘이면 족했다. 오죽하면 n분의 1로 나와 이웃에 사시는 목사님, 소속교회 목사님에게 나눠줄 수 있으리라 했겠는가. 그러나 딱 마음만이었다. 보름 동안 내린 비는 얄궂었다. 참깨는 잘 마르다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고추는 비가 그친 뒤 둥그렇게 병을 얻었는데 그것이 탄저병이란다. 두 고랑의 고추 모두가 탄저 폭탄을 맞은 것이다. 그래서 고추 농사를 짓는 농민은 비가 내리기 전, 비가 내린 뒤 고추를 살리기 위해 농약을 잔뜩 뿌리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몇 근이라도 고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을 안치는 나로서는 병든 고추대를 뽑아 버리는 것으로 예방을 하였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방책이다. 지금은 손놓고 바라볼 뿐이요, 그중에 살아남은 몇 개의 빨간 고추만 딸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엄청 쓰렸지만, 지금은 자연의 이치라고 여기며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 편한 일이다.
이주 전 심은 배추와 무는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배추의 약점은 벌레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어린잎이 올라오는 족족 벌레들의 침공으로 이때도 약을 쳐야 하는데, 약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또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살아날 녀석은 어디에 있더라도 살아난다는 믿음(?)으로 기다렸는데, 비록 잎들에 벌레가 먹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다. 내가 심는 배추와 무로 김장은 못하더라도 겨우내 짠지와 동치미로는 넉넉할 것이라 본다. 콩도 여물어가고 있다. 꼬투리에 콩이 여물지 않은 콩들도 있으나 첫 술에 배부르지 말자는 너그러운 마음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는 계속 부정적인 생각만 올라와 내 속을 스스로 쓰리게 할 뿐이다.
태풍의 영향일까? 바람이 세차다. 주중에 혹은 추석 연휴에 올 수도 있는 태풍! 막바지 수확으로 향하는 들판에 큰 상처없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란다. 그러면 꼬투리의 콩들은 더욱 굵어질 것이며, 꽃이 피고 수정을 시작하는 들깨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논의 벼들은 이삭의 무게로 고개를 숙여 수확이 다가옴을 알게 할 것이다. 그래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명절의 분위기를 한껏 품지 않겠는가.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