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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와 함께 춤을
한국교회의 유별난 특징 중의 하나는 찬송을 부를 때 함께 박수를 치며 부르는 것을 즐겨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즐겨한다 하기 보다는 집착한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만 박수를 치며 빠른 속도로 부르는 찬송은 통성기도 그리고 새벽기도와 더불어 한국교회만의 영적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이는 저 또한 매우 뜻깊게 여기는 것으로서 엄연히 우리 한국교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기도합니다.
물론 교회별로 차이가 있으며 개인적인 성향도 다르지만 어색해 하고 머뭇거리고 기어이 그에 동참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뿐, 누군가가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면 나도 모르게 양 손이 올라가고 결연한 표정으로 다섯 번의 박수를 칠 준비가 되는 것처럼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박수의 그 강렬한 이끌림에 조건반사처럼 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박수를 치는 것이 우리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 성도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사뭇 충격적인 장면으로까지 보여 질 수 있습니다. 제가 독일 교회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을 때 그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고요함과 별다른 반응 없이 무표정한 성도들의 얼굴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독일인들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해서 과장하는 것을 병적으로 꺼려합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사유와 성찰의 DNA가 있습니다. 그런 독일인들의 정서적인 특징이 그들의 정적인 예배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만일 한 독일의 교인이 한국교회의 예배에 참석해서 박수 찬송에 충격을 받는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패전을 겪으며 생긴 군사문화와 전체주의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 때문일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군사문화와 전체주의적인 정서를 통해 정치, 경제,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수준의 양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문화와 전체주의적 정서는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을 타고 별다른 저항 없이 한국교회만의 영적 특징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물론, 박수를 치며 찬송하는 것에는 흥겹고 힘찬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남용되거나 천편일률적인 박수찬송은 경계해야 합니다. 찬송가는 유행가도 아니요 군가도 아니며 새마을 노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 말씀 선포의 능력이 있고 신앙고백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빠르고 흥겨운 찬송일지라도 가사를 충분히 묵상하며 불러져야 합니다. 찬송가는 다른 무엇의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설교에 즉각적으로 ‘아멘’하도록 회중을 단순하게 만들거나 감정의 고조나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르면 쉽게 하나가 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박수 찬송이 끝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분위기가 뚝 끊기고 맙니다. 그 적막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예배는 여백과 침묵과 쉼 없이 온갖 소리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예배의 바탕은 하나님의 제1언어인 침묵이 되어야하는데 말입니다.
박수가 회중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찬송 자체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찬송을 함께 부르는 모든 성도들을 영적으로 섬세하게 연결시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연합니다. 전체주의적인 하나가 아니라 찬송을 부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찬송의 주체로서 살아 있는 가운데 진정한 하나가 되는 자유로운 연합을 이루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빠르고 힘찬 찬송가도 외적인 박수에 끌려가는 것 보다는 저마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박동을 함께 느끼면서 조금 삐그덕 거릴지라도 살아 꿈틀대는 마음과 영의 박수를 함께 느끼면서 차고 나가는 것이 훨씬 더 뜨겁고 역동적일 수 있습니다. 또한 박수 찬송을 너무 자주 하게 되면 조건반사처럼 손이 움직이고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찬송에 감동이 되어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움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박수 찬송은 오히려 매우 조심스럽고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은 언뜻 보면 박수치며 부르기에 딱 좋아 보이는 흥겨운 찬송입니다. 그러나 이 3/4박자의 찬송을 한 마디에 세 번씩 박수를 치며 ‘강강강’으로 부르게 되면 ‘강약약’의 삼박자 리듬이 무너지고 이 찬송의 진정한 아름다움인 ‘품격어린 흥겨움’이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이 찬송가를 부를 때면 우리 교회의 한 원로장로님처럼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부르거나 너무 튀는 것 같아 민망하다면 한 마디에 한 번씩 몸과 손을 덩실덩실 움직여가며 부르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실제로 이 찬송가는 한국적인 정서가 살아 있는 명곡으로서 구원받은 한 성도가 성령에 거나하게 취하여 누가 보건 말건 간에 상관없이 앞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찬송하는 이미지를 품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 여호와의 궤 앞에서 춤을 추는 다윗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한 마디에 세 번씩 박수를 치면서 ‘강강강’으로 빠르게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히려 이 노래의 참된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박수는 현대 회중 예배에 녹아든 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싶습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노래뿐만 아니라 춤도 즐겨하는 민족이었습니다. 북한이나 연변 지역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무리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춤은 우리 민족의 영적 감수성 속에 내재 되어 있습니다. 단지 춤을 추는 다윗을 바라본 미갈처럼 고도 성장기의 퇴폐 문화의 영향으로 손상된 춤의 영성을 업신여기게 된 것일 뿐입니다.
찬송에도 춤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대 회중예배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왕 박수를 쳐야 한다면 춤의 역할을 박수가 대신 한다고 생각하면서 음악에 알맞은 춤과 같은 박수를 치면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춤을 잃어버린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춤과 음악과 민족성과 영성은 매우 밀접합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노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리의 춤도 잃어버린 것이고 자연스레 한국 교회에서 민족성도 모호해져서 우리의 영적 모국이 한민족인지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도통 불분명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제 검색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이 찬송가를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덩실덩실 ‘품격어린 흥겨움’을 품고 춤이 곁들여진 노래처럼 부른 녹음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나 같이 정제된 발성의 만들어진 소리로만 부릅니다.
힘차게 하나가 되는 박수 찬송도 좋지만 한국교회는 춤의 찬송을 다시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시작은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다윗과 같은 꾸밈없는 모습으로 서는 것이며 공동체적으로는 우리 민족적인 영성을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 가락, 우리 영성이 담긴 찬송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https://youtu.be/i_c7HgG6eZs
조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