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The Breadwinner, 2017)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최근 국내외적으로 가장 뜨거운 소식은 단연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탈레반의 집권과 미군의 철수, 목숨을 건 탈출, 아프가니스탄 난민 수용에 관한 국내의 거센 반대 목소리와 그 반대를 의식한 듯 ‘우리나라에 협조한’이라는 변명을 붙여 한국으로 이송한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조력자들의 소식 등은 여전히 뜨겁게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중이다.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다른 나라들과 대등한 현대적 정상 국가의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듯하지만, 간간히 흘러나오는 극단주의자들의 일탈은 이것이 일탈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가 들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특히나 여성인권과 관련된 어두운 전망은 피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종교적 신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태는 더욱 비참하다. 지금도 우리가 가까이 경험하는 것처럼 근본주의에 열심까지 더해진 신앙은 그 어떤 합리적인 문제제기나 사고의 개선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 수도 카불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진보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던 7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들이 자유로운 복장과 교육의 수혜 등을 아무런 제한 없이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96년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여성 교육권의 박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인권 몰락의 시작에 불과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은 탈레반 정권 하의 여성의 삶을 한 어린 소녀의 삶을 통해 눈에 그리듯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르바나의 아버지는 전직 교사로 전쟁에서 한 쪽 다리를 잃은 채 노상에서 잡동사니를 팔고 글을 읽어주거나 써주는 일로 근근이 가족의 생계를 꾸리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 곁에서 함께 물건을 팔고 있는 파르바나에게 아버지는 아프가니스탄이 겪었던 수많은 침략의 역사뿐 아니라 민족의 숭고함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탈레반에 열성적인 전 제자로부터 모욕을 받고 급기야 그 제자의 고발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감옥에 수감된다. 이때부터 어머니와 언니, 어린 남동생과 함께 사는 파르바나의 상상도 못할 일상이 펼쳐진다. 탈레반 치하에서 여자는 혼자서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다.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동반하는 남자가 없다면 먹을 것을 사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진퇴양란의 상황 속에서 11살의 파르바나는 신묘한 아이디어를 낸다. 이미 장성한 언니와 달리 아직까지 자신은 남장을 해도 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소녀는 남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 일하고 먹을 것을 사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이미 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무서운 불안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절망 속에서 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들키는 날에는 말 그대로 끝장인 살얼음 같은 삶을 11살의 소녀는 매일 매일 감행한다.
영화는 캐나다의 작가 데보라 엘리스가 쓴 4권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다.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된 책의 제목은 영화의 영어 원제목과 동일한 『브레드위너』다. ‘빵을 마련하는 자’를 뜻하는 Breadwinner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을 뜻하는 단어다. 남장 소녀 파르바나는 한 집의 가장으로 먹거리를 벌고 수감된 아버지를 구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고군분투의 파르바나와 가족의 모습 속에서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는 슬프고 감동적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때마침 시의적절하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이런 식의 박해를 가능케 하는 신앙이란 대체 무엇일까? 역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기도시간이 되어 집안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는 파르바나와 그의 어머니와 언니의 모습은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든다. 신앙에 기댄 인간에 대한 속박과 박해가 어디 이슬람뿐일까. 파르바나가 겪는 모든 모순과 고난 속에서, 나는 내가 속한 종교와 우리의 신앙을 더불어 돌아본다.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