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을 부르는 교회
사람들이 묻는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입지가 좋은 길목에 있거나, 유명세를 탄 교회일수록 물음이 많을 것이다. 만약 아무 물음조차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대부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뻔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호기심 천국이라고 하기에는 어느 새 속내를 많이 드러내 보였다.
교회는 더 이상 낯선 매력이 없다. 게다가 한동네에도 여러 개씩 존재하는 교회들은 세상의 경쟁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아 차별성도 없어졌다. 저마다 연륜에서 오는 품격과 고상한 문화가 남다른 것도 아니다. 유감스럽지만 더 이상 교회에 대한 질문이 사라진 이유이다. 그 결과 교회는 자신 있게 세상에서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오늘 대부분의 교회는 고독하다. 세상 안에서 외로운 섬처럼 존재한다고 느낀다.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다만 자신만을 위해 분주할 뿐이다. 모든 세상잡사를 하나님께만 맡길 뿐, 교회와 교인들은 그 책임을 방기한 지 오래이다. 달력을 넘기듯 시대가 바뀌고, 세대는 변했지만, 교회는 어제오늘 그대로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는 세상 밖 딴 세계 풍경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기도 속에는 세상 걱정으로 가득하고, 온갖 현실에 대한 관심이 넘치지만, 아쉽게도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는 되지 못한다. 교회 안팎은 허구 헌 날 요란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기대도 관심도 눈길도 끌지 못한다. 종교학자 F. 쉐퍼는 “어떤 종교의 신자가 10퍼센트만 되면 그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는데, 과연 그리스도교는 그러한가?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8년 만에 독일로 돌아간 루츠 드레셔는 처음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국교회를 관찰하였다. 독일교회에 전한 보고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한국교회의 특징 다섯 가지이다. ‘교회에 갈 때 성경책을 꼭 갖고 다닌다. 예수님 믿으면 부자가 되려니 생각한다. 기도를 소리 내어 열심히 한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교회와 제일 가난한 교회가 공존한다. 목사 중에는 운전사 딸린 자가용을 탄다.’
이방인의 관찰은 낯설지만 따듯하다. 생소하나 애정이 담겨있었다. 외국인의 시각을 통해 포착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지극히 당연한 까닭에 정작 우리에게는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국외자와 다름없는 교회 밖 사람들의 시선은 외국인 선교사보다 훨씬 냉정할 것이다. 호기심은커녕 냉소로 가득하고, 생소하지만 물음을 느끼지 못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묻지 않는데 교회는 그들에게 무엇을 대답할 것인가? 필리핀 마닐라침례교회 앞에는 이런 전도문구가 써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답이다.”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킬킬거린다. “우리가 뭘 물었는데?”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회는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서만 자문자답할 뿐, 사회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침묵이 만들어 낸 고질병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인간의 내면을 향하고, 동시에 세상을 향하고 있다. 당장 듣기에는 모순과 역설처럼 들리지만, 사람의 정신과 세상의 구조를 뒤집으려는 에너지로 가득하였다. 당시 세계의 중심축으로서 삶의 형식을 규정한 율법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외려 더욱 율법정신에 온전해 질 것을 요구하였다.
지금 지나치게 현실에 순응하면서 세상과 타협한 교회와 복음은, 그 결과 세상의 그럴듯한 일부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정작 세상에서 씨앗도, 누룩도, 소금도 되지 못하였다. 물음이 콱 막혀버린 배경이다. 물음을 부르는 교회, 물음을 던지는 교회, 그리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의 존재와 의미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대해 묻게 하는 교회, 교회는 그런 삶의 물음표와 시대의 상징 언어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송병구/색동교회